도스토옙스키, 위고, 플로베르, 프루스트, 울프, 디킨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반즈, 쿤데라, 페렉, 호세이니, 우엘벡…….
이들은 내게 진솔한 한 문장, 한 단어, 한 장면에
세상의 본질과 사람살이의 섭리가 스며들어 있음을 일깨워준
문학적 스승이자 길동무들이다.
어떤 길이든,
길의 속성은 끝과 시작이
하나라는 것이다.
소설로 평생을 바친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말처럼
그 어떤 방해 없이
깊고 짙게
혼자만의 지독하고도
내밀한 만남을 위하여,
무엇보다 소설을.
---「작가의 말」중에서
여행의 묘미는 목적했던 곳에 도달하는 과정 중 뜻밖에 만나는 장면이나 사람, 사태, 즉 돌발성이다. 나는 쿠바에 왜 갔던 것일까. 아니, 아바나에, 아바나에서 코히마르에, 그 한적한 어촌에. 그들을 향해 걸어가는 사이, 나는 그들을 만나러 온 것만 같이 신기할 정도로 반가운, 그래서 지레 느꺼운 기분에 휩싸였다. 태평양을 횡단해서 북미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중남미 멕시코로, 그리고 그곳에서 또다시 유카탄 반도를 지나 카리브 해의 섬나라 쿠바까지 온 목적과 행로가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진 채 말이다. 놀랍게도 거기, 그들, 노인과 소년이 있다니!
---「코히마르에서 만난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중에서
무엇보다 홍차를. 그리고 프티 마들렌 한 조각. 겨울로 가는 길목, 파리의 11월을 회상한다. 박쥐가 검은 두 날개를 펼친 듯 컴컴하고 음울한 11월 오후를 잘 보내기 위해서 나는 때로 특별한 티타임을 준비하고는 했다. 돌이켜 보니, 평소와는 다른 사치스러운 시간이었다. 비스킷도 아니고 카스텔라도 아닌, 그 중간 형태의 프랑스 전통 과자 마들렌 한 조각을 따뜻한 홍차에 곁들여 준비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오렌지 불빛의 조명을 켜고 찻잔 옆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화집을 펼쳐놓았고, 실내에는 비발디의 사중주 곡을 흐르게 했다. 유별난 듯 보이는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편의 소설, 잠 못 드는 한 사내의 거대한 회상을 따라가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다.
---「마들렌 효과, 프루스트를 읽는 겨울 오후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에서
프레데릭 모로가 걸어가고 멈추고 다시 걷고 돌아서며 바라보는 길들을 따라 파리의 냄새, 파리의 취향, 파리의 현실, 파리의 형상이 되살아난다. 이렇게 보면, 소설이란 별것 아니다. 우리가 보고 겪는 삶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그러면서 스타일을 갖춰 가지런하게 풀어내면 된다. 그것이 소설이라고 조이스는, 또 박태원은, 또 그들의 선조인 보들레르와 플로베르는 『율리시스』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으로, 또 『악의 꽃』으로, 그리고 『감정 교육』으로 웅변하지 않는가! 만약 파리가 궁금하다면 『감정 교육』의 프레데릭 모로의 행보를 따라볼 일이다. 플로베르 스타일로, 21세기의 플라뇌르flaneur(한가로이 도시를 떠돌듯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산책자)가 되어!
---「파리에서 플로베르 스타일을 만나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감정 교육』」중에서
이들이 살고, 떠나고, 넘고, 돌아보고 다시 이어가는 각 장은 하나하나가 산이고, 산들은 골짜기, 즉 행간마다 메아리를 품고 있다. ‘그리고의 선 역사처럼,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메아리의 정처는 사랑이 되기도 하고, 도리에 대한 죄의식(윤리)이 되기도 하고, 향수가 되기도 한다. 산이 깊을수록 메아리는 깊고 크다.
---「이야기, 소설, ‘그리고’의 세계 -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산이 울렸다』」중에서
소설에 관한, 아니 길에 관한 이런 명제가 있다.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되었다.” 이 명제는 소설을 매개로 하여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행해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자극해왔다. 길과 여행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문맥으로는 전후관계를 형성하지만, 순서를 뒤바꾼다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길이 끝나자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길이 끝나면 여행도 끝이 난다. 그러나 가끔 이야기가 소설로 진화하기도 하는데, 이때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비로소’의 세계이다. 여행과 길을 한 편의 소설로 탈바꿈시키는 ‘비로소’라는 문장부사는 문장 맨 앞에 놓여서 전前 역사를 괄호 속에 묶어버리는 ‘그리고’와 동류이다. 길과 여행을 대상으로 일반인과 소설가의 차이, 또는 여행기와 소설의 차이는 바로 이 두 부사에 대한 의식과 실현에 있다.
---「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 성석제 외, 『도시와 나』」중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출발점으로 소설의 원형은 길 위의 인간을 대상으로 쓰여 왔다. 익명의 도시이든 가상의 공간이든, 소설은 인간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면 그곳이 어디든, 매번 새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 성석제 외, 『도시와 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