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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의 정원

아브락사스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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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3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278g | 130*195*20mm
ISBN13 9791186748916
ISBN10 118674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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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마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여자가 이렇듯 특별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동안 여자 친구를 여러 명 사귀었지만 이렇듯 설레지는 않았었다. 나는 마리에게서 빛이 나는 걸 느꼈고, 한 번씩 가슴이 벅차올라 심호흡을 해야 했다. 특히 그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아 시선을 돌려야 했다. 나는 눈매가 야무지다고 표현했지만 장의 말이 더 옳았다. 매력적인 눈이었다. --- p.68

“그러니까 저 설산이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사스인 거지?”
그러나 마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거하고는 다른 얘기야.”
뭐가 다르다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가 다시 말했다.
“이 마그리트의 설산은 희망을 얘기하지만,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는 천사와 악마를 공유하면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완전한 신을 뜻하거든. 그래서 나는 데미안을 다섯 번쯤 읽어본 결과 이런 생각을 했어. 싫든, 좋든 아브락사스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고,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 p.84~85

“그래도 다이애나가 낫다는 건, 그녀가 진심이 있어서야. 그녀는 아무나 안 키워. 자신이 첫눈에 반해서 실제로 사랑에 빠져야 움직여. 그런데 스타제조기라는 새끼들은 다 너희를 소모품 정도로 여기거든. 장난감이지, 가지고 놀다가 귀찮아지면 아예 망가트려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지. 말을 안 듣는 애들은 그냥 이 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고. 그렇게 사라진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마리도 그게 싫어서 꿈을 접은 거 아냐.” --- p.122~123

게다가 우려했던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마리와 다이애나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리도 필요했고, 다이애나도 필요했다. 결국, 마리에겐 다이애나를, 다이애나에겐 마리를 거짓으로 둘러댔다. 마리에겐 다이애나가 철저하게 일로만 맺어진 관계처럼, 다이애나에겐 마리가 그저 그런 사이였는데 이젠 그마저 흐지부지 헤어진 것처럼. 두 사람 다에게 못할 짓이었지만 나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마리는 내 말을 믿어주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달랐다. --- p.137

나는 점점 더 불면에 시달렸고, 어쩌다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이 들면 휴대폰 벨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와 고통스러웠다. 잠결에서도 다이애나에게 전화가 온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래서 화들짝 일어나 휴대폰을 받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화가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했으면서도 나는 마구 뛰는 심장 부위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런데 그때에도 휴대폰 벨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왔다. 열다섯 번을 울리다 끊기면 잠시 뒤 또 열다섯 번을 울리고, 또 끊기면 또 울리고, 또다시 끊기면 또다시 울리고. 나는 미칠 것 같았다. 단지 환청일 뿐인데도 실제 다이애나가 옆에 있으면 목을 졸라 죽여버릴 것 같았다. 멀쩡한 사람이 순식간에 돌아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p.175~176

앞쪽 창가에 세 개의 하얀 알이 담겨 있는 새둥지와, 창문 밖 저 멀리 독수리 같은 새와 결합된 웅장한 설산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새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더 이상 마리를 힘들게 하지 마! 하는 비난의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심한 자책에 사로잡혔다. 어느 순간, 현기를 느끼며 이성이 지배할 수 없는 세계로 빠져들었다. 눈이 시렸다. 그림 속 설산의 찬 기운이 내 눈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눈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섬뜩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한순간 감정이 무너지며 발작을 하듯 컥컥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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