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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장판 ]
박수정 | 가하 | 2017년 03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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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540쪽 | 560g | 128*188*30mm
ISBN13 9791130015446
ISBN10 113001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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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뚜벅뚜벅, 등 뒤에서 저승사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신혜?”

바로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딴판으로 차분한 목소리여서 더 겁났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현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아몬드 모양의 눈이 내 얼굴을 본 순간 놀라움에 한껏 커졌다. 그러더니 뺨에서 시작해서 얼굴 전체가 서서히 노을처럼 곱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저렇게 얼굴까지 빨개질까.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아, 폭발 직전이구나.

“잘못했어요!”

그가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나는 외쳤다.

“진짜 실수로 그런 거예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땐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그러고 나서 엄청 후회했어요. 밤에도 악몽만 꾸고요!”

너무 무섭고 후회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막 났다. 나는 울면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주워섬겼다.

“죄송해요! 정말로요! 제가 알바해서 꼭 갚을게요! 엉엉!”

내가 갑자기 울자 유현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신혜……?”
“전 사실 이신혜가 아니고 손정은이에요! 아까 걔가 이신혜고요, 엉엉!”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주위가 조용해서 나는 문득 울음을 뚝 그쳤다. 유현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은 양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꼭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 같다.

“자, 자. 일단 밥부터 먹죠. 다들 앉아요.”

윤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유현의 표정을 힐끔 곁눈질로 훔쳐봤더니 다행히 화가 좀 가신 모양이다. 아까처럼 험악한 기운은 없어서 나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충격을 받은 듯이 어딘가 멍해 보이는 유현과, 훌쩍거리고 있는 내 몫까지 윤이 알아서 주문했다. 그는 우리 셋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 즐거워 보였다. 뭐 항상 그런 사람 같기는 하지만.

“아까 내 소개는 했고, 이쪽은 내 친구 정유현이라고 해요. 아, 정은 씨가 깨먹은 트로피에 이름 쓰여 있었으니까 알겠다. 그죠?”

가해자인 나는 피해자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현 씨는 그때보다도 훨씬 더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온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나는 주눅이 든 나머지 눈동자조차 마음대로 굴리지 못했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유현은 요리가 날라져 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혼잣말처럼 말했다.

“손정은이란 말이지?”

뒤에 ‘그럼 경찰에 전화해서 이신혜가 아니라 손정은이라고 해야겠군.’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나는 용기를 쥐어짜 내서 말했다.

“혹시 경찰에 신고하실 거예요?”

순간 윤이 푸웃,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와인을 마시던 중이었기 때문에 사레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리는 그를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지금 웃음이 나오나?

한참 후에야 진정한 윤이 겨우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꼭 신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윤. 너 무슨…….”

하지만 윤은 들은 체도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경찰까지 갈 필요 없이 둘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안 그래?”

가만, 지금 내 편을 들어주는 거잖아?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그거 되게 비싼 거거든. 아니, 사실 값으로 따질 수조차 없는 물건이지만 정은 씨는 학생이잖아. 무슨 돈이 있겠어? 그러니까 다른 방법으로 갚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장난치지 마.”

유현이 나이프를 쥔 채 윤을 향해 살벌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기겁을 했다. 내 귀에는 ‘그게 얼만데 지금 장난해?’로 들렸다. 우리 엄마가 칼 든 사람 성질나게 만들지 말랬는데! 그래서 정육점에서만은 백 원만 깎아달라고 한 번도 말 못해봤는데!
하지만 윤은 유현이 조금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눅이 들기는커녕 실실 웃으며 이런다.

“돈으로 변상시키는 대신 다른 걸로 때우게 하면 어떨까?”

옳다구나! 나는 냉큼 끼어들어 말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할게요!”

윤은 더욱더 즐거운 표정을 했다.

“정은 씬 뭘 잘하는데?”
“뭐든지 잘해요! 김밥집에서 오래 일해서 김밥도 잘 말고요, 신문도 잘 돌려요! 서빙도 잘하고 고기도 잘 굽고, 계산도 잘하고, 아 그리고 청소도 잘해요! 커다란 모텔 청소 저 혼자 다 한 적도 있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윤이 내 편을 들어줄 때 어떻게든 일을 무마해야 했다.

“뭐든지 다 할게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덧붙이자 윤이 유현에게 말했다.

“들었지? 뭐든지 다 하겠대. 뭘 시킬래?”

유현의 얼굴에는 아주 곤란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긴장한 나머지 테이블 밑에서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제발 안 된다고 하지 말았으면!
한참 만에야 유현은 자신 없이 말했다.

“그럼, 청소나 밥 같은 거……?”

영 내키지 않는 것일까. 중얼거리다시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정확히 들었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나는 그 동아줄에 죽자고 매달렸다.

“할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마음이 바뀌기 전에 못을 박아야 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할게요! 저번에 그 집으로 가면 되는 거죠?”

유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저 정말 열심히 일할게요. 지켜봐주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몇 번이나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사는 법이다. 일해서 죗값을 갚을 수 있게 되니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가벼운지 몰랐다. 꼭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줄줄이 나오는 요리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 맛있는지. 나는 언제 울고불고 했느냐는 듯이 맛있게 먹고 신이 나서 웃고 떠들었다. 윤과 나는 죽이 잘 맞았다.

“그럼 두 분이 같은 회사에서 일하시는 거예요?”
“아니, 유현이는 개발자고 나는 퍼블리셔. 무슨 소린지 알려나?”
“만드는 쪽이랑 서비스하는 쪽이요.”
“천잰데?”

윤이 감탄해주는 바람에 나는 으쓱해졌다. 역시 리액션이 좋으니까 얘기할 맛이 난다. 유현과는 정반대였다.

“이거 더 먹어.”

윤이 자기 접시에 있는 커다란 새우를 내 접시로 옮겨줬다. 내 새우는 나오자마자 빛의 속도로 까먹고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찌나 크고 맛있는지 한 마리밖에 없는 게 서운한 참이었다. 음식이 맛있긴 한데 죄다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 양밖에 안 나온다.

“고맙습니다!”

내가 신이 나서 윤이 준 새우를 까는 동안 유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 접시에 있는 새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새우랑 눈싸움 하나?

“유현이는 우리 회사 초창기 멤버고 대주주야. 지금은 따로 개발사 차려서 나갔지만. 지금도 유현이가 만드는 게임은 거의 우리 회사에서 서비스해. 무지 비싸게 받아먹어서 그렇지. 정은인 잘 모르겠지만, 유현이는 유명한 스타 프로듀서거든.”

식사 내내 윤은 주로 유현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런데 정작 유현은 별로 말이 없었다. 가끔씩 가뭄에 콩 나듯 말할 때도 내가 아니라 윤에게 했다. 물론 나한테 좋은 감정이 없어서겠지만.
식사가 끝나고 나는 윤의 차에 탔다. 그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유현과는 식당 앞에서 작별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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