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 전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눈길엔 걱정과 함께 희망이 어렸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 전체가 원숙해지고, 중국 정부의 행태도 따라서 바뀌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누구나 조금씩은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중국은 그런 기대가 헛되었음을 매일 보기 괴로운 모습으로 확인해준다.
중국이 보이는 그런 모습을 이루는 특질들 하나하나가 실은 중국 사회를 다듬어낸 문화적 유전자들이 구현된 것들임을 깨달아야, 우리는 비로소 중국을 이해할 수 있고 적절한 대응의 첫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다. 그런 발생적 관점에서 살피는 데는 이 책을 고쳐 쓰는 것보다 출간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살피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에서 이 서문을 준비했다. 프랑스 속담대로, “변할수록, 같아진다.”
이 서문은 중국의 공격적 태도가 폭발적 반응을 낳은 남중국해 문제와 최종단계 고고도 지역방어(THAAD)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남중국해 문제는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 질서를 흔드는 정책을 펴게 된 중국의 사정을 살피는 데 좋고, 그렇게 공격적인 중국의 정책에 대한 국제적 대응책을 모색하는 계기가 된다. 후자는 한국에 대한 중국의 고압적 자세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난 사례여서, 중국의 위협적 태도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된다. --- p.10
풀릴 길 없는 남중국해 문제는 세계 모든 나라들에게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계속 일깨워서 중국의 외교를 극도로 어렵게 만들 것이다. 남중국해엔 방대한 유전을 비롯해서 풍부한 자원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자원의 가치는 흔히 과장된다. 아무리 그런 경제적 가치가 크더라도, 당사자들인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및 베트남과의 관계 악화와 다른 나라들의 경계에 따를 무형적 손실에 비기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다.
이처럼 결과가 뻔히 보이는 외교적 구덩이로 중국 정권이 성큼 들어간 것은 중국 인민들이 품은 공격적 민족주의를 고려해야 설명이 된다. 중재재판소의 판결에 승복한다고 선언하면, 중국 공산당 정권은 ‘영토를 지키지 못한 정권’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그런 비난은 인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붕괴를 부를 수도 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자신의 압제적 통치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고 고취한 공격적 민족주의가 이제는 공산당 정권도 거스르기를 두려워할 만큼 커진 것이다. --- p.43
이제 자유와 평화를 위해 국제법과 국제 질서를 지키려는 나라들은 만주사변의 교훈들을 새기고 스팀슨주의를 남중국해 사태에 적용할 길을 찾아야 한다.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는 중국에 대해 판결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들은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한 상설재판소의 판결을 지지하고 그것을 어긴 중국의 행태를 비판하고 그런 불법적 행위로부터 얻은 중국의 모든 이익을 인정하지 않으며 남중국해는 공해이므로 모든 나라들과 개인들이 국제법에 따라 자유롭게 항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원칙을 선언해야 한다. 중국에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이런 선언은 장기적 점거로 ‘시간이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논리를 따라 남중국해의 암초들을 점유하려는 중국의 책략을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만주사변을 맞아 미국 한 나라가 보인 대응인 ‘스팀슨주의’를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이 계승해서 발전시킨 원칙이 될 것이다.
스팀슨주의의 정신을 이어 받되 미국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신스팀슨주의’라 불릴 만하다. 이 ‘신스팀슨주의’는 미국이 주도하겠지만 일본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터이므로, 만주사변에서 피해자로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던 중국이 이제는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 질서를 깨뜨리는 오만한 공격자가 되었고 당시의 공격자였던 일본이 국제 질서의 유지에 앞장선다는 반어(反語)를 품을 것이다. 이런 반어는 워낙 신랄해서, 신스팀슨주의를 더욱 매섭게 만들 것이다. --- p.86
민주주의 국가들이 유화정책의 유혹을 물리치고 중국이 남중국해에 관한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은 긴요하다.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하지만 비교적 쉬운 이 과업에서 민주주의 국가들이 실패해서 중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국제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허용한다면, 파멸적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에 제동을 걸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1930년대에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군부가 해외 팽창 정책에 나선 것도, 1935년에 히틀러가 라인란트의 재무장을 시도한 것도, 직접적 요인은 갑자기 어려워진 경제였다. 압제적 통치를 견디던 사람들도 경제가 어려워져 자신들의 삶이 궁핍해지면, 정권에 대항하게 된다. 중국의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는 더욱 거세어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지금부터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정치적 의지를 다져야 한다. --- p.122
비록 언뜻 보기에 심각한 양난으로 보였어도, 한국이 맞은 문제는 실은 양난이 아니었다. 국제법에 따른 중재재판소의 판결을 지지하는 것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었고 그래서 옳은 선택이었다. 강성한 이웃이 두려워서 판결을 지지하지 못하는 것은 따라서 그른 선택이 었다.
서글프게도, 한국 정부가 보인 행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리석고 비겁했다. 판결이 나기 전, 미국은 ‘당사국들이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힐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 자신의 주장의 근거가 약해서 불리한 판결이 나올 것을 예상한 중국이 미리 판결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였으므로, 국제법에 따른 국제 중재를 따르라는 얘기는 당연한 논평이었다. 동맹국 미국의 요청도 있었으므로, 그런 입장을 밝힌다 하더라도, 중국의 반발은 한국에만 향할 리 없었고, 자연히, 제한적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한국은 “판결이 나오기 전에 태도를 밝히는 것은 어렵다”면서 미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판결을 존중하라고 권하는 것이 왜 판결이 나오기 전엔 어려운가? 판결이 나온 뒤엔 쉬운가? ‘판결을 존중하라’는 얘기야 판결 전에 해야 효과가 크고 반감도 덜 살 것 아닌가?
이처럼 첫 고비에서 비겁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으니, 사태가 진행될수록 옳은 선택을 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일본이 중국의 판결 불복을 강하게 비난하자, 한국은 겁이 나서 거기 동참하지 못했다. 겨우 ‘외교부 대변인 성명’이란 것을 뒤늦게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남중국해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였다. --- p.126
중국 정권이 북한 정권을 감싸는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중국에 미칠 정치적 영향이다. 북한에서 압제적 정권이 무너지면, 자유화의 바람은 중국에서도 거세게 불 것이다. 한 사회에서 일어난 혁명은 이웃의 압제적 사회들에서도 혁명의 기운을 일으킨다. 최근의 예는 ‘아랍의 봄’이니, 당국의 자의적 단속에 죽음으로 항의한 튀니지의 젊은 행상은 폐쇄적 아랍 사회들에서 튼튼해 보였던 압제적 정권들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얼마 전 홍콩 당국의 행상 단속이 거센 반중국 시위를 부른 상황은 ‘천안문 사건’의 악몽에 시달리는 중국 지도자들의 꿈자리를 더욱 어지럽힐 것이다.
그래서 중국 정권은 짐만 되는 북한 정권을 큰 비용을 들여서 떠받친다.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으니, 그들은 속셈을 숨기려 별의별 연기를 다 한다. 북한의 도발이 나올 때마다, 양쪽이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논평을 내놓아, 논점을 흐려서 북한을 두둔한다. 자신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작다고 늘 강조하고, 심지어 북한의 모욕적 대접을 사서 받기도 한다. 북한이 워낙 폐쇄적이라 경제 제재가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논리도 편다.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에 참여할 수밖에 없으면, 경제 제재의 과정을 방해한다. 북한의 위협을 막을 THAAD가 중국을 위협한다고 시비를 걸어, 논점을 흐린다. 최근에 북한이 규모가 큰 핵폭탄을 시험하자,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는 한 중국 신문은 한국에 THAAD를 배치하려는 움직임이 북한을 핵실험으로 내몰았다는 ‘창의적’ 의견을 제시했다. --- p.160
남중국해와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는 멀지 않아 온 세계에 드리울 것이다. 그 그림자가 더 음산해지는 것을 막는 일은 21세기에 평화롭고 번영하는 인류 사회를 보장하는 데 결정적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 힘든 과업에서 자유주의 국가들은 외교와 전쟁이, 클라우제비츠적 뜻에서나 경기이론적 뜻에서나, 동질적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체주의 군대를 맞아 끝내 승리한 지휘관의 충고는 그리도 적절하다. 윌리엄 슬림 원수는 그의 회고록 『패배에서 승리로』에서 충고했다, “두 작전 경로들에 관해서 확신할 수 없으면, 장군은 더 과감한 쪽을 골라야 한다.”
---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