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아파서 힘들어했던 환자가 나의 진단과 처방으로 조금씩 나아질 때는 보람이 있지만, 아무리 치료해도 호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진단이 틀렸나, 내가 놓친 진단이 있나 반복해서 확인해 보고, 경우에 따라 내가 틀려서 다른 방법으로 다시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을 환자 앞에서 고백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순간에는 나도 너무 고통스럽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 솔직하게 나의 소견과 검사 결과를 밝히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라는 게 경험으로 얻은 소신이다. 가끔 틀릴 때도 있지만 하루 10명의 환자를 만나면 10번, 50명의 환자를 만나면 50번, 어떻게 하면 이 환자를 낫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민하는 게 일인 의사라는 직업은 분명 선한 직업이고, 적어도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 같다.
--- p.49-50
고공 농성장에 의료 지원을 다녀 본 결과 농성으로 인한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공통적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과, 고공 농성 시간이 길어지는데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언론의 관심도 시들해지면서 생기는 원망과 조급함으로 우울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고공 농성장은 모든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지만 의료진만은 예외이다. 올라가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은 의료진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국 의료진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기본적인 건강 검진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수다쟁이가 되어야 하고, 어떤 때는 물리치료사 혹은 운동처방사가 되어야 한다. 간혹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고공 농성을 중단시켜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 p.88
가정의학과 개업의의 육체적 노동 강도는 강한 편이 아니다. 환자를 진료하고 드레싱(상처를 소독하는 일)이나 처치를 하는 일이니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동네 주치의로서의 어려움은 환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가는 것, 그에 따라 병원을 오래 비울 수 없다는 부분에 있다. 의사들은 다른 업종과 달리 종업원이나 타인에게 병원을 맡길 수 없고, 설사 대진의(아르바이트 형태로 일정 기간만 업무를 맡기는 의사)를 초빙해 놓는다 해도 동네 의원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원장을 ‘주치의’로 생각하고 찾아오기 때문에 낯가림을 상당히 한다. 이런 관계 때문에 휴가는 물론 학회나 회의 참석 등의 일정으로 병원을 비우기가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 p.93
말기암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도저히 어떻게 해 볼 길이 없는 극심한 암성 통증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사들은 극심한 암성 통증에 적절히 대처할 수가 없기에 심각한 통증 환자를 만나면 저절로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환자의 통증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확실히 경감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통증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는 통증 환자에 대한 귀찮음보다는 인도주의적인 연민을 가질 여유가 있다. 거의 모든 만성 통증 환자는 우울증과 수면 장애를 동반하고 있는 탓에, 통증치료실 의사는 항우울제 및 수면제에 대한 지식까지 갖춰야 한다. 또 거의 모든 만성 통증 환자는 의사 혹은 가족, 친지들로부터 버려졌다는 소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통증을 충분히 경감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줘야 한다.
--- p.123
세상에는 미쳤다고 손가락질받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자기가 미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관용적인 표현은 때론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농담으로도 쓰이지만, 대개는 비난, 배제, 혐오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더 이상‘미쳤다’는 표현을 입에 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선 정신과 의사가 그런 차별적 표현을 쓰는 것이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미쳤다’는 말의 의미가 너무 모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략) 정신과 의사에게‘미쳤다’는 표현은 그 속에 담긴 차별적 편견 외에는 큰 의미가 없는 말이다.
--- p.179
지난 10여 년간 재활의학의 저변은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최근 들어서는 인기 전문 과목의 대열에 들어서기까지 한 것을 보고 많은 초기 재활의학과 의사들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노령화에 따른 재활 치료 대상의 확대일 것이다. 노인들의 경우 뇌혈관 질환의 유병률이 높을 뿐 아니라, 각종 근골격계 질환의 발생률도 높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 전체 의료비의 90퍼센트가량을 만 65세 이후에 사용한다. 즉 노인들이 많아질수록 전 국민 의료비가 증가하고 재활의학의 대상도 확대된다. (중략) 그런데 최근의 급격한 노령화로 2000년대 들어 10년 만에 노인 인구가 7퍼센트포인트가량 늘어 지금은 14퍼센트 수준이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빨라져, 2025년이면 한국은 노인 인구가 20퍼센트를 넘는 초고령 사회가 된다.
--- p.191-192
‘나는 우리나라 산업보건을 개선시키고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는 전문가’라는 자부심 가득한 직업의식과‘회사라는 거대 조직을 상대하는 한낱 힘없는 개인일 뿐’이라는 현실 인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때론 보람을, 때론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여성들이 많이 근무하는 사업장에서 채용 시에 근로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신 검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해물질을 사용하는 사업장 환경에서 자기도 모르게 임신한 상태인 근로자를 보호하려는 좋은 목적도 있었으나, 법을 떠나 인도적인 차원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음 날 사업장 담당자를 만나 설득했고, 그날부터 임신 검사는 사라지게 되었다.
--- p.208
예방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시민의 입장에서는 병원을 오가면서 많은 의사들을 만나지만 예방의학 의사는 아마도 마주친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예방의학 전공자의 전문성은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연구자, 보건의료 문제를 진단하고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행정가·정책가, 지역사회 보건 사업을 실제로 수행하는 실천가의 역할에 있다. 세부 전공에 따라 각 영역의 비중은 조금씩 다르다.
--- p.217-218
평소 나는 요양병원을 나이 든 의사들이 은퇴 후 소일하러 가는 병원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틀린 생각이었다. 요양병원은 우리나라 복지의 민낯이자, 우리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현장 그 자체다. 이곳은 복지의 장소가 아니라 소외와 격리의 장소이며, 노인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문턱이다. 더욱이 이곳은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마지막 정거장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부유층은 예외로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차별과 소외의 장소인 것이다.
--- p.240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도화지에 의사를 그릴 때면 꼭 빠뜨리지 않는 것 역시 헤드 미러다. 이처럼 헤드 미러는 모든 의사의 상징이 되었지만, 사실은 이비인후과에서만 쓴다. 어두운 귓구멍, 콧구멍, 목구멍에 빛을 반사해 밝게 들여다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머리로 빛을 조정하니 양손을 환자 치료에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빛을 제대로 맞추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전공의 1년 차 시절, 헤드 미러를 쓰고 수술을 앞둔 환자의 코털을 깎는 첫 미션을 수행하면서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 p.247
의사는 환자의 신뢰를 필요로 한다. 감기에 항생제와 주사제를 처방하지 않아도 나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처방약을 먹다가 부작용이 생겨도 나에게 다시 와서 상담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증상이 빨리 사라지지 않더라도 원인을 찾아보자는 나의 말을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소신껏 진료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환자들이 언제 어디서나‘닥터 쇼핑’을 할 거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진료가 줄어들게 된다. “ 선생님덕분이에요”라는 말은 내가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느끼게 해 준다. 의사에게는 정말이지 환자의 신뢰가 절실하다.
그러나 환자도 의사의 신뢰를 필요로 한다. 아프다고 하면 믿어 주고 공감해 주는 의사,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는 의사, 약의 부작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되고 잘 낫지 않는다고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의사를 필요로 한다. “저는 선생님의 진료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요, 그냥 제게 이런 부작용이 생겼다는 걸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의사 말이다. 환자들이 부작용을 호소하거나 상급 병원에서는 다른 설명을 들었다고 얘기할 때, 이것이 자신을 질책하는 것일까 봐 지레 방어적이 되는 의사 말고, 자신에 대한 환자의 믿음을 신뢰하는 그런 의사 말이다.
--- p.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