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 살의 신열무는 영장류에 속하지만 자신의 종과 구별되는 사고체계와 이상행동을 보이는 일종의 변종이다. 겉모습은 영장류 인간 암컷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때때로 자신이 인간인 것과 암컷인 것을 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암컷의 특징인 젖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지만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여서 많은 학자들이 수컷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암컷이라고 외출할 땐 꼭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여름에는 겨드랑이털을 미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 변종 암컷 신열무는 성질이 포악하고, 드세며, 야행성이다. 식성은 이러한 성질과 어울리지 않게 채식과 곡식 종류를 주로 섭취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수컷 한 마리를 그대로 찜쪄먹을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물론 학계에 보고된 바는 없다.
이 암컷의 발정기는 시시때때로 나타나며, 발정기 때 수컷을 찾지 못하면 혼자 우는 습관이 있다. 현재 이 암컷은 자신의 짝을 찾지 못했는데 난자가 몇 개 남지 않아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문제는 국가에서 이 암컷을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은커녕, 소중하게 보호하려고 들지도 않아 이 암컷이 최근 수컷을 찾으려고 서식지인 광화문을 벗어나 종로와 강남 일대까지 출몰하고 있다. 오랜 성적 굶주림과 멸종 위기에 대한 스트레스로 암컷 신열무는 1년 넘게 위장장애를 겪고 있었으나, 자신의 위장장애는 모두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작가적 고뇌 때문이라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그해 이른 봄, 암컷 신열무가 주요 서식지인 광화문을 벗어나 인접해 있는 인사동에 나타난 것은 대학선배가 소개해주겠다는 한의사가 수컷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위장장애와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열무를 안타까워하던 선배가 아는 한의사를 소개해주겠다며 그동안 몇 번이나 제안을 해왔지만 열무는 한방치료는 그때뿐이고 돈이 많이 들어 부담스럽다며 내내 거절해온 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 한의사가 수컷이라는 걸 알게 된 열무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처럼 손바닥 뒤집듯 당장 한의사를 만나게 해달라며 선배를 채근했다. 위장장애가 더 심해져서 이제 죽조차 소화할 수 없다고 징징거리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른 봄의 어느 일요일 저녁, 암컷 신열무가 대학선배와 수컷 한의사를 만나기 위해 인사동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인사동 골목 맨 끝에 도착한 암컷 신열무는 자신의 옷매무새부터 살폈다. 지나치게 꾸미고 나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평소 입는 그대로 입되 깔끔하고 단정하게 보일 수 있도록 신경을 쓴 참이었다. 대신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면서 달콤한 향이 날 수 있도록 향수를 신중히 골라 뿌렸다.
열무는 빵가게 유리창에 자신을 비춰보며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한껏 긍정적인 얼굴을 했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다. 짧은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흰색 패딩재킷을 걸친 그 모습은 얼핏 보면 이제 막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오랜 위장장애로 양 볼 가득 뾰루지가 돋아 있어 더더욱 그래 보였는데, 그나마 신고 있는 여성용 구두가 그녀가 암컷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암컷 신열무는 자신이 지금 그 큰뿔야생양 암컷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걸 모르고 한 마리 귀여운 다람쥐라도 되는 양 베이커리 앞을 서성였다.
“이야, 예쁘게 하고 나왔네.”
약속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선배가 열무를 보자마자 칭찬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치료가 주목적이 아니었다는 걸 들킨 것만 같아 열무가 살짝 민망스러워하며 웃었다.
“아니야, 원래 이렇게 입고 다녀.”
“으음, 그렇구나.”
경진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그녀가 아끼는 후배들이라 이번 김에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론 그 과묵하고 진지한 성격의 남자 후배가 신열무를 무서워하면 어쩌나 조금은 걱정도 되었다.
후배 열무는 여자들에게는 다정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데 남자에게는 무뚝뚝하게 굴어서 남자들이 다가오다가도 도망가기 일쑤였다. 한데 이 눈치 없는 한의사 후배가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이고 있으니 신열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져갔다.
“얘가 좀 늦네. 주말이라 버스가 밀리나 보다.”
경진이 한의사 후배 대신 변명을 하는데, 그 순간 한의사 후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버스를 잘못 타서 십여 분 정도 더 걸릴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열무는 버스를 잘못 탔다는 말에 설마 이 한의사라는 후배가 ‘띨빵한’ 스타일인가 싶어 속으로 찜찜했다. 한의사라기에 당연히 지능 쪽은 의심치 않고 성격에 대해서만 물어봤는데 반전이 숨어 있는 걸까? 암컷 신열무는 기대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수컷 한의사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언니, 그 후배 생긴 건 어때? 잘생겼어?”
경진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간단하게 말했다.
“음…… 머리가 크고, 키가 짜리몽땅해.”
사실 평균 키에 머리가 조금 클 뿐이었는데 경진은 열무의 기대심리를 바닥까지 끌어내려 놓는 게 서로 호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이미 한의사 후배에게도 만나게 될 여자 후배가 예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해놓은 참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 후배가 늦게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크고 키가 짜리몽땅하다는 말에 열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실 남자 키가 작은 건 상관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키가 작은 남자가 멋있게 일처리를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어서 키 작은 남자도 충분히 멋질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남자는 적어도 그 키에 맞게 머리도 작았다.
“언니, 그 후배…… 옥장군 수준이야?”
경진이 얄궂은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의 비슷할걸.”
열무는 일순 손발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인사동 길목에 놓여 있는 돌덩이 벤치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잘 꼬여서 간만에 연애 좀 해보자, 그런 마음이었는데 그 한의사가 자신에게 반해서 따라다니면 어쩌나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암컷 신열무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다짐 같은 말을 뱉어냈다.
“병 고치는 데 전념해야겠다.”
열무는 모든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은 듯 주위에 있는 상점과 좌판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한쪽 모퉁이에서 재생지로 만든 연습장을 싸게 팔고 있는 걸 보고는 연습장 세 권을 샀다. 번역일을 하면서 가끔씩 소설을 쓰는 열무는 연습장을 많이 쓰는 편이라 외출했을 때 이런 좌판을 만나면 여유분을 사두곤 했다.
빵가게 앞으로 다시 돌아온 열무가 연습장 한 권을 선물이라며 경진에게 건네고는 가방 안에 두 권을 챙겨 넣었다. 생긴 건 차치하고 어쨌든 황금 같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진맥해주는 것이니 고마움의 뜻으로 건넬 생각이었다. 그 사이 경진은 빵가게 안으로 들어가 피칸파이를 사서 나왔다.
“네가 좋아하는 피칸파이 샀어. 이따 배고프면 먹자.”
“어.”
열무가 뭉클한 얼굴로 경진을 바라보았다. 대학 때야 붙어 다니며 친하게 지냈지만, 사회에 나온 후로는 서로 일이 바빠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최근에 열무가 번역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면서 자주 보는 것이었는데, 대학 때 피칸파이와 치즈케이크를 좋아했던 열무의 식성을 경진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방 안에 피칸파이를 챙겨 넣던 경진이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너 밀가루 소화 못 하잖아.”
“괜찮아. 소화제 먹으면 되지. 어차피 밀가루고 쌀이고 다 소화 안 돼.”
이제는 소화 안 되는 일에 이력이 붙은 열무가 상관없다는 듯 웃어넘겼지만 경진은 열무의 얼굴에 온통 돋아 있는 뾰루지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얼마 전 보았을 때도 얼굴이 노랗게 떠 있어서 안타까웠는데 상태가 더 심해진 듯싶었다.
경진이 피칸파이를 챙겨 넣고는 열무가 먹을 떡을 좀 사야겠다 싶어 떡가게가 어디에 있나 둘러보는데, 멀리서 후배가 뛰어오고 있었다.
“어! 저기 온다.”
열무가 얼른 경진이 쳐다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살펴보았다. 멀리서 한 남자가 큰 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어오고 있었는데, 옥장군보다 머리가 작고 키가 컸다. 시무룩하니 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열무의 두 눈동자에 살짝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한의사 후배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거의 한 발자국 거리에 멈춰 서자 열무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어둑한 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확연히 보였는데 자신과 동갑내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와아, 늙었어.”
암컷 신열무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외쳤다. 수컷에게 늙었다는 말은 치명적인 거부의사, 그것은 곧 너를 수컷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성욕이 전혀 안 느껴진다는 말과 진배없는 것 아닌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