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정부는 인도 여성의 낮고 비참한 위상과 차별을 받지 않는 영국 여성의 고상한 삶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지닌 남성다움과 영국인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반면에,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도 남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집안과 베일에 갇힌 인도 여인들과 대비되는 우월한 영국 여성이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나 의사로서 식민지와 ‘밖’에서 활동하는 순수하고 도덕적인 백인 여성들은 나락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야만국의 가엾은 자매들’을 도왔다. 그 중에는 여성에게 참정권은 필요 없다고 발언하여 여성의 열등성을 인정하고 남성을 기쁘게 만든 ‘백의천사’ 나이팅게일도 포함되었다. 밖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영국 여성들의 ‘성적 순수성’은 베일과 어두컴컴한 집안이 상징하는 관능적인 인도 여성과 비교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국은 인도인의 나약하고 여성적인 특성이 모두 힌두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다. 진보를 필연적이며 자연의 법칙으로 간주하던 19세기의 영국 지배자들은 진보의 에이전트인 서양의 기독교와 달리 힌두교는 과거에 닻을 내린 무력한 종교라고 파악하였다. 그 속에 “도덕적 원칙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행복 그리고 공공의 가치와 국가적인 에너지가 잠들어 있다”고도 간주되었다. 인도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악은 나약한 힌두교과 생성한 퇴적물이었고 최대의 희생자는 가여운 여성들이었다.
(이옥순, 「영국의 인도 통치와 젠더 이념」 中)
이러한 정책들의 첫 번째 결과는 많은 사건들과 일반적인 역사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서 재해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의 정책을 평가하는 과정이 그의 사후에 시작되었고, 소련의 모든 역사를 통해 소련 이후의 시기까지 이어짐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소비에트 몰락 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성(statehood)이라는 의미를 구축하고 확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소비에트 이후의 공화국의 개별적인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여러 사람들의 시도로 이어졌다. 이것은 때때로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해석을 진전시킨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결과 우리가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사례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들의 역사 속의 다양한 사건들의 해석이 두 가지 담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즉 민족주의적인 해석과 소비에트적인 해석이 두 개의 양 극단을 이루고 있다. 역사의 서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소련 이후의 중앙아시아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것은 아니고 옛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소비에트식 그리고 탈 소비에트식 담론들의 기능적 의미는 똑같은 기능적 의미에 기여한다. 두 가지는 모두 자신의 사회에 대한 애국심과 헌신이라는 의미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티무르 다다바예프, 「중앙아시아의 ‘공식적’ 역사 담론과 살아있는 역사-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집산화와 스탈린주의 억압의 회고」 中)
‘내지연장주의’가 한창일 때, 다이쇼 9년(1920) 7월, 차이페이훠, 린청루 등이 차이후이루[蔡惠如] 등 지방 명사의 지원을 받고 도쿄에서『타이완청년』을 창간했다. 내용면에 있어서는 정치 ?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역사, 사회, 언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황차오친에 의하면 『타이완청년』의 창간에서 당초 편집 방침은 타이완의 정치적 자유와 계목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신문학운동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1922년 4월, 기관지명을 『타이완[臺灣]』으로 개명한 후에는 신문학운동 관련 논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조선인에 의한 민족자결운동, 민족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계몽운동은 타이완인의 운동에 비해 앞서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도쿄에 온 조선 유학생들은 이미 여러 단체를 조직하고 기관지의 간행과 사상의 선전 및 보급을 실행하고 있었다. ” 이처럼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타이완인 유학생 수가 현저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에 관해서도 그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재경 타이완인은 적극적으로 조선인과의 연대를 꾀하고자 했다. (지쉬펑, 「‘일본유학’과 근대 타이완의 정치청년 ? 법률청년의 탄생-타이완총독부의 교육정책을 중심으로 」中)
구한말부터 학부를 잠식하여 식민지 교육의 기반을 마련한 일제는 한국 병탄을 계기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민족 동화를 위한 보다 적극적인 식민지 교육정책을 수립하고자 부심하였다.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에 식민지 교육정책 수립의 실무자였던 일본인 구마모토 시게키치[?本繁吉]는 “주로 조선민족을 과연 동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구하고 아울러 그것에 관련된 조선민족 교화의 방침에 대하여 사견을 진술한” 것이라는 「교화의견서」를 비밀문서로 제출하였다. 그는 여기서 “일본제국민의 충성심은 일본민족에 고유한 조선숭배(祖先崇拜)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민족의 천황에 대한 관계는 이 복종에 더하여 조선숭배로부터 연원한 경애의 지적”이라 하여 조선숭배에 뿌리를 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일본민족의 특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어 동화의 의의에 대하여 “가장 엄정한 의의에서 조선민족의 동화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본민족의 언어 ? 풍속 ? 습관 등을 채용 모방시키고, 더 나아가서 일본민족의 충군애국의 정신을 체득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철저한 동화는 류큐[琉球]나 타이완[臺灣]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우선 차선책으로 ‘조선민족의 순량화(順良化)’를 주장하고 있다. 즉 “조선민족을 교화하여 제국의 순량한 신민(臣民)으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민족에 대하여 항상 종속적 지위”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김승태, 「일제의 식민지배와 식민통치 이데올로기」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