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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의 눈썹을 가진 고양이

앙리 4세의 눈썹을 가진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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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치유 에세이 top100 10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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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346g | 130*195*30mm
ISBN13 9788998690090
ISBN10 899869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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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하수형
서강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詩와 종교학을 공부했다.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워낙 몽상가’. 타고나기를 라디오 수신기처럼 예민하여, 이 인간 안테나로 사는 애로를 다스릴 도구와 스승, 방법론들을 찾아 헤맸으나 제도권 교육과 문화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방치된 예민함은 잦은 상처들로 이어져서, 늘, 나를 실현시킴보다는 나를 잃지 않음이 더 절박해서 내면 탐구와 치유에 골몰했다. 한동안 기업인들의 멘토로 지내는 한편 점점 정신적 새 지평에 대한 갈증이 차오르던 차, 35세 생일 아침 일기를 쓰다가, 누군가가 불러준 것 같은 힌트처럼 떠오른 ‘피레네’, 오직 이 세 글자에 이끌려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의 태양은 지난 삶의 파편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눈부신 돋보기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남서부 피레네에서 과거의 자신과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가며 자아와 세계에 대한 전망의 변화를 겪고, 혼자 담고 살아가기엔 과분한 에너지를 얻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년에 한 번씩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 마리오네트 축제를 위해 비행기를 탄다. 여분의 시간에는 고양이들을 돌보거나 주말농장의 밭을 가꾼다. 마법 수프의 재료로 쓰려고, 이따금 고양이가 흘린 수염과 발톱을 모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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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삶의 시간은 내가 결석한 꿈속의 교실 같은 거였다. 그러니까 프랑스로 떠나기 전부터 나는 이미 어딘가에 떠나 있는 상태였으며, 그곳에 다녀오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어딘가를 헤매는 나를 다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p.12

고양이는 살아 있는 오르골이다. 그들은 온기의 전령이고 그들 자신 또한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13년 묵은 나의 고양이 제롬이 비스듬히 누워 꼬리를 팡팡 치고 있다. 지난 세월 이 녀석은 제일 나쁜 순간조차 늘 함께였다. 쓰다듬음과 온기의 시간은 항상 있어 왔다. 삶의 매 순간, 위로는 늘 무심한 듯 슬그머니 깃들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건과 감정들이 휩쓸고 지나가도 삶은 지속되는지도 모른다.--- p.83

우리가 이른바 ‘왕의 산책길’ 상티에 뒤 로이Sentier du Roy(성벽 아래를 죽 따라 나 있는 앙리 4세의 산책길. 로이Roy는 왕을 뜻하는 루아roi의 고어)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어느 집 창가에 희한한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흐릿한 날씨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데 그렇게 생긴 고양이는 처음 보았다. 온몸이 하얗고 눈썹만 따로 숯으로 그려넣은 듯 검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사람 같은 눈썹이었다. 눈썹만 아니라면 그저 그렇고 그런 길고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꽤 추웠던 이날, 마농과 스테파니는 순순히 잘 따라와준 우리들에게 일종의 보상처럼 성 옆 크레페 가게에 데려갔다. 자리에 앉으면서 가게 벽에 걸린 앙리 4세의 초상화에 저절로 눈이 갔는데 우리는 동시에 깜짝 놀랐다. 앙리 왕의 눈썹은 정말 독특했는데 그 형태가 하필이면 아까 왕의 산책길에 나타났던 고양이와 똑같았던 것이다.--- p.101

강의실에서 마리 크리스틴은 우리들을 환대하며 이미 클래스의 당연한 일원으로 간주했다. 그녀는 예의 그 희극배우처럼 유머러스한 어조로 한 학기 수업을 안내했다. 이 학기에는 앙리 4세 서거 400주년을 맞아 이 역사적인 왕에 대해 공부한다고 한다. 마리 크리스틴과 역사 선생 미리암이 협력하여 성 방문과 관련 전시 둘러보기 프로그램을 마련한 참이었다. 시청각 강의와 학생들끼리의 설문조사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역사 시간에는 왕가 계보도와 함께 영화 [여왕 마고]의 앞부분을 보기도 했다. 오래전에 별 생각 없이 봐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마고가 정략 결혼한 멍청하고 매력 없어 보이는 자가 바로 앙리 4세였다.--- p.276

나는 그동안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품어왔노라고 했다. 그녀는 책을 다 쓰거든 메일을 보내라면서 주소를 적어주었다. “여기에서의 삶이 너를 변화시켰으므로 이제는 쓸 수 있을 거야. 로도스 섬으로 떠난다니, 그 섬에서부터 조용히 쓰기 시작하게 될 거야. 같이 수업하면서 보면 너는사용하는 어휘들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지. 널 시적인 아이라고 생각해왔어. 네가 제 2의 아멜리 노통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 p.297

떠남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심장이 태양과 처음 만났던 포를 뒤로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채,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현실로 돌아간다. 내가 품고 산 유년이 저기 있다. 그것은 9개월이었다가 하루가 되고 그 한나절은 다시 찰나가 되어 멀어진다. 비행기가 떠오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찾아왔다. 마치 그간 꿈을 꾸다가 문득 슬며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비행기에서 나는 마지막 일기를 적는다. 삶이라는 연습장에 실망이 적히지 않은 드문 페이지다.--- p.305

비사교적인 나의 경우, 사람들과의 이별보다는 장소와의 이별이 더 애틋하다. 한 마리 집 떠난 고양이처럼 이제부터 긴 향수병에 시달릴 것이다. 기억들을 재구성하는 게 어디까지 가능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여기에서의 삶을 통틀어 ‘삶의 한가운데 요람’이라 명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도시를 떠나며 적은 마지막 일기를 읽으니 왠지 모를 느낌이 북받친다. 비행기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마치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며 다른 우주로 가는 순간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무런 특별함이 없는 삶일지라도 어느 날 내가 어떤 곳에 태어나 순식간에 꿈을 꾸고 다시 그 꿈을 작별하는 느낌. 나는 그렇게 그 도시에 잠시 태어났었고 얼마간 살다가 거기를 떠났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거기에 하나의 나를 두고 떠나와서는, 지금도 어딘가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때마다, 내게는 영원한 현재일 것만 같던 그곳을 떠올린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곳의 내가 뒤를 돌아본다.--- p.309

“책을 쓰다니, 얼마나 예쁜 생각인가!” 언젠가 마리 크리스틴은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포의 햇빛은 결국 내게 책까지 쓰게 만들고야 말았다. 포의 햇빛과 피레네의 자연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이제 나는 따뜻하면 나그네가 옷을 벗게 되는 햇빛과 바람의 우화를 믿겠다. 생애를 통틀어 달콤했던 기억이다. 내 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온기가 가시지 않은 햇빛의 잔열이 있다. 나는 이름 모를 꽃들을 엮듯이 만든 이 기억 한 다발을 누군가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서로 이방인으로 만난 우리들은 그곳에서 잠시나마 작은 천국을 이루고 살았다. 별의별 인간군상은 어디에나 있지만 심장에 넣을 우애 한 조각이면 그럭저럭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엔 아주 따뜻한 것들이 많이 있다. 조건 없는 포옹과 미소, 사랑스런 눈빛이 짓는 일상, 살아가는 일이란 그냥 별일 없이도 원래 다정한 것이다. 그래야 한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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