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민주시민교육에 관해 논의들이 의외로 많았음을 확인했다. 거기서 많이 배웠다. 그러나 내 관심사 나 ‘취향’과는 거리가 먼 것들도 많았다. 논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병 든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하 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연구들 이 외국의 논의들을 ‘기계적으로’ 소개하기만 하는 듯했다. 또 철학자인 내가 보기에 많은 논의들이 어딘가 조금 가볍게만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무언가 우리 교육 현실에 맞는 나름의 접근 방식을 찾아내 고 우리나라에서 발전시켜야 할 민주시민교육에 튼실한 철학적 기반 같은 것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포부가 생겼다. 이 책은 바로 그런 포부의 산물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철학적 교양서’로 서 궁극적으로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와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호소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기에 일반 독자들과 교육 현장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좀 더 친숙하게 주제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 본문 중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본디 그저 단순한 수동적 구성원이 아닌 참된 주인이자 주권자로 이해되는 시민이 국가의 기본적인 틀을 짜고 방향을 결정하는 국가다. 여기서는 헌법을 비롯한 법을 만들고 정부를 구성하며 국가를 운영하는 데서 시민이 중심이고 또 시민이 궁극적인 정당성의 원천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시민 없는 민주공화국은 존재할 수도 작동할 수도 없다. 오직 유능한, 역량 있는 시민만이 이 민주공화국을 민주공화국답게 만들 수 있고 올바르게 꾸려갈 수 있다. --- p. 30
간단히 말해, 모든 아이가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중요한 인간적 삶의 모든 차원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역량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표의 추구, 바로 이것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가진 정의 지향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지향은 교육적 성취의 결과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가피한 불평등 상태 같은 것은 그 자체로 문제 삼지 않는다. 가령 교육받은 모두가 모든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하거나 박사 학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새 패러다임은 누구든 사회 속에서 저마다의 좋은 삶을 꾸리는 데 필요한 기본역량만큼은 반드시 갖춘 채 공교육의 장을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 p. 109~110
민주주의 패러다임에서 민주주의는 교육의 목적이자 대상이며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하고, 민주주의에 대해 교육하며, 민주주의를 통해 교육해야 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어떤 특정한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의 비전과 원리와 교육적 일상 전체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틀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단순히 ‘기회의 균등’ 같은 분배 정의의 이상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이 새 교육 패러다임의 핵심축이다. --- p.113
사실 그 어떤 인간적 좋은 삶도, 그것이 타인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 한, 오로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충분히 보장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정치적 삶을 그 자체로 최고의 인간적 삶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개인적 수준에서 온전한 시민적 역량과 자질을 갖는 것은 좋은 삶을 위한 필수적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오직 자기 삶의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는 데 스스로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만 낯선 힘에 끌려다니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좋은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기 위해서도, 또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지위나 재화의 불의한 분배 상황을 교정할 수 있기 위해서도 충분한 시민적 역량을 지녀야 한다.
이렇게 보면 개인의 잠재력 계발과 시민적 역량 및 자질의 함양이라는 목적은 서로서로 강화하고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 사실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직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만이 모든 성원의 온전한 잠재력 계발과 실현을 그 도덕적 목적으로 삼을 것이고, 또 거꾸로 그러한 도덕적 목적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란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이 지니는 저마다의 잠재력을 제대로 계발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은 ‘좋은 시민(good citizen)’을 길러내는 교육일 수밖에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래전 칸트의 통찰에 기대어 말한다면, 이런 좋은 시민들만이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만이 온전한 좋은 시민의 양성에 관심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 p.116
민주시민교육으로 학생들은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원리나 규칙을 가지는지,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 시민들은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를 더 잘 발전시키고 운용할 수 있을지 등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계속 강조해 왔지만, 민주시민교육은 이런 목적을 가진 교육을 단순히 지식의 전수라는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지식 교육이 아예 불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시민교육은 지식 교육을 하더라도 학생들이 비판적이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사유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 p.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