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광수생각' 같은 만화를 좋아하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난 조심스럽게 답해 줄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런 만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만화에 있는 아포리즘으로 당신의 삶은 변화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이런 생각은 누가 보내주어 최근에 읽고 있는 '좋은 생각'이라는 책을 만나면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벽은 참 크고 두껍다. 좀체로 깨지지 않는 두꺼운 벽 같다고나 할까. 그런 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큰 다는 것은 몇 개나 갖고 있는 그런 벽들을 하나하나 깨어가면서 자신의 순수한 마음(있는지는 모르지만)에 다가가는 것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그 벽을 깨는 것을 사람들과의 대화도 있을 것이며, 자신의 경험, 그리고 독서나 영화, 음악 같은 문화적인 체험들을 통해서 일 것이다.
독서에 너무나 큰 기대를 걸 필요는 없지만 사람들은 '광수생각'이나 '좋은 생각' 같은 책을 읽으며 자신을 순화하려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책들은 그 벽을 건드리는 작은 울림을 될지라도 그 벽을 뚫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드는 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 책들을 즐겁게 읽고, 신문사에 있을 때는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한다는 주장을 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런 책들이 독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그토록 쉬운 방식이나 전달자들의 깊이로 사람들 마음의 벽을 쉽사리 뚫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쓴 것은 문인이나 문화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영향을 묻는 한 기획서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든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읽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그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 그들의 마음에 깊숙이 남았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힘이 있기에 글을 쓰는 이들이 숭앙하는 텍스트가 됐는지 궁금했다.
어릴적 책 제목을 들으면 털복숭이 괴물인줄로 알았던 조르바는 책 속에서 보니 괴물은 괴물이다. 다만 인간형중에서 괴물이라는 거다. 그를 표현하자면 내가 앞에서 말한 마음의 벽으로 이야기하면 거의 모든 벽을 부수고, 그 벽들의 경계를 자유스럽게 넘나드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굳이 단어로 표현하면 무애(無碍)다.
백면서생 나(레모니 선장)는 뱃사람들의 카페에서 그를 만나 동행한다. 하지만 나는 가진 것 없지만 당당하고 활달한 조르바에게 매료된다. 활달도 도가 넘은 조르바는 성직자가 수도를 위해 성기를 자른 것을 병신이라고 욕하지만, 자신은 도기를 만드는 기계에 손가락이 닿아 불편하자 여지없이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과단자다. 때로는 종교에 대한 냉소, 여성에 대한 끊임없는 찬사와 쾌락을 탐익하던 조르바와 나는 크레타섬에서 갈탄광 사업을 위해 머문다.
종교에 대한 직선적인 사고로 많은 반감을 사기도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수작을 이윤기씨가 번역한 이 책은 인간이 많은 경계를 벗어나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인물에 대한 인상기다.
카잔차키스가 만났던 실제인물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실제로 작가의 삶에 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책을 읽는 재미는 책속에 한 지성을 통해 대변되는 많은 아포리즘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 아포리즘은 관념도 있지만, 조르바의 삶에 자세에서 보여진다. 스무살 때 산투리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배우는 조르바의 모습, 조금 광폭하지만 부불리나를 사랑하는 조르바의 사랑법 등은 삶의 야성이 뭔지를 가르쳐준다. 또한 화자에게 전쟁의 광기에 참여해 살인과 강간을 일삼아본 이후 어느곳도 자신 조국이 아니라 모두가 한 형제라는 조르바의 활달한 국가관은 무해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본문의 중간에 '강인했기 때문에 그토록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려 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존경했다'며, 조르바에 대한 인상을 밝힌다. 이런 관점은 조르바나 작가의 종교관에서도 강렬하게 드러난다. 이미 수도원에서 고형화된 썩은 종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생각들을 따르려는 삶을 살았다. 그런 마지막의 흔적이 작가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인 '나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라는 문구일 것이다. 이 책 역시 독자들 '내부에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육체를 부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꼼꼼히 읽다보면 부박한 아포리즘으로 독자의 영혼을 깨우려는 이들의 책보다 휠씬 깊고, 큰 감동을 줄 것이다.
--- 99/11/16 조창완(chogaci@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