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 〈변방〉이다.
오는 4월경 사단법인으로 발족할 예정인 (가칭) 〈희망來일〉 준비위원들이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를 초청해서, 시베리아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김창진 교수는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변방〉이라고 했다.
전제주의와 농노제에 반대해 싸웠던 수많은 활동가들이 유배지인 시베리아라는 〈변방〉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워 갔노라고 설파했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생각하고, 특정한 위치에서 밀려나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넓은 시야를 갖게 되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 창조적 대안을 모색하는 등 〈변방〉은 〈변방〉대로의 특성을 갖는다고 했다.
모색과 분투 끝에 〈변방〉은 새로운 중심으로 나아갔다고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김대중 - 노무현 두분 전직 대통령님들도 〈변방〉에서 밀려다니면서도 모색과 도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삶을 살았고, 마침내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역시 인종차별과 온갖 편견과 세계 패권주의에 맞서서 〈변방〉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분이라고 생각된다.
나 역시 〈변방〉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3차례 제적되는 등 22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으며, 위수령으로 강제 징집되어 최전방 철책선 등에서 근무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4년 2개월 이상 옥고를 치루었다. 대구교도소에서는 해방 이후 한반도 전쟁과 관련해서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고 20년-30년씩 복역해오던 미전향 좌익수들과 함께 오랜 기간을 같이 대화하고 생활하기도 했다.
교도소를 나와서는, 부평 한일스텐레스(주)에 소위 위장 취업해서 노조 대의원을 했으나, 회사 측의 부당전출 끝에 끝내 해고되기도 했다.
부평 4공단 입구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다루던 샘터서점을 4년간 운영했다.
1988년 평민연으로 정치권에 들어와서는 부평에서 국회의원, 지방의원 선거에서 거듭 낙선하였고, 이후 공천실패, 경선실패 등의 쓰라림 속에서 20년 넘게 정치권 주변을 맴돌았다.
2003년에 노무현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시민사회비서관과 인사혁신비서관 등 요직을 맡아서 일을 했으나, ‘소수파’라는 한계 때문에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2005년부터 철도공사 초대 감사로 일하면서도, 이철 사장과 함께 철도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등 커다란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경영평가 등에 대한 관계 부처의 안일한 조치에 항의해서 임기 절반 정도 만에 사표를 던지게 되었다.
아마도 공기업 임원이 자진해서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나는 오랜 기간 〈변방〉으로 밀려다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사색하고 모색해왔다.
청와대에서 요직을 맡아서 일하거나, 3만 명이 넘는 최대 공기업인 철도공사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또 일했다.
〈변방〉에서 다른 이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일하고 싶어 했던가?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이것은 개선해야 하는데...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나는 지금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가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서로 돕고 아껴주면서 오순도순 재미나게 사는 세상, 사회적 약자라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연과 환경이 조화로운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을 나는 원하고 또 원한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넘어서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고, 지식정보 사회로 가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돌파할 힘은 오직 〈변방〉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지도력은 맡은 일에 대한 성실함과 그 결과에 대한 진솔한 성찰과 더불어 대안을 모색하는 소통 속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은 〈변방〉에서의 모색과 사색의 결과물인 동시에 정부 요직에서의 활동에 대한 보고서이고 진솔한 자기 고백서이다.
우리의 이러한 꿈과 희망의 〈변방〉이 한반도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그러한 한반도는 다시 인류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세계의 중심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나는 또한 미래의 관점에서, 진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은 진보가 보편적인 가치라는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분단체제 속에서 ‘진보’ 라는 단어는 진보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치명적인 낙인으로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해서, 결과적으로는 대중적 영향력이 부족한 집단들이 오히려 진보라는 용어를 독점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은 이제 진보를 국민 대중들이 다 함께 말하자고 외치고 있다.
〈진보의 미래〉를 말하면서, 진보의 길로 함께 밀고나가자고 절규하고 있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떠오르는 것을 노무현 전 대통령님은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는 것 같다.
미래는 20:80 사회가 된다고 한다.
생산력의 발달과 정보력의 집중으로, 소수 독점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한다. 20만 일해도 인류가 충분히 먹고살 생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론적으로는 80이 실업자가 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진보〉는 두 가지 근원적인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일자리 나누기가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회가 온다면, 그 해결책은 다수가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나누는 방법 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회복지 서비스 분야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대대적으로 만드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시민의 힘으로 소수 독점을 통제하는 길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스웨덴 같은 선진 북유럽 국가들은 소수 독점 기업들에 대한 세율이 매우 높다고 한다. 사회적 책임이 강조된다고 한다.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기술 벤처 중심의 중소기업 체제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대규모 독점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 수단을 확립해나가는 일도 긴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진보〉는 결국 다시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 같다.
시민들이 미래 공동체를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 수준을 높여나가고, 독점에 대한 통제 수단을 장악하는 것만이 미래 공동체 사회를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통과 컨설팅, 거버넌스와 올바른 민주시민 교육의 확대, 풀뿌리 민주조직의 확산, 국가운영에 대한 치밀한 준비, 문제해결 능력의 향상방안 등을 상시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정치역량을 높이는 길을 꾸준히 찾아나가야 한다.
보잘 것 없는 글들이다.
그러나, 〈변방〉의 정신만큼은 살아있는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나올 수 있도록 고생하신 김학민 학민사 대표, 유영주 희망來일 간사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긴 세월을 〈변방〉에서 겉돌기만 했는데도, 저에 대한 관심과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격려해주고 함께하는 오랜 동지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