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바울이 헐려고 한 것은 ‘율법의 행위’(opera legis)이지 결코 행위 자체는 아니라고 보며, 바울이 도리어 ‘신앙의 행위’(opera fidei)를 세우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는 신앙과 은혜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며, 두려움을 주어 강요하는 율법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이며, 일시적인 약속을 통해 자극되어 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는 “자유롭게 만드시는 영을 통해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ex spiritu libertatis amore solo Dei) 하는 행위다. 그는 이런 신앙의 행위는 믿음을 통해 의로워진 사람이 아니면 결코 행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말하자면, 루터가 헐려고 했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강요되어 일시적인 유익을 얻으려고 하는 위선적 행위다.
---「5장_ ‘칭의론의 정초’」중에서
이 시기가 루터의 칭의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유는, 루터가 신앙과 행위의 관계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당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를 주장함으로써, 가톨릭교회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폐지하는 소위 ‘율법 폐지론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설교와 저작들을 통해 그 비난을 반박하는데, 믿음은 행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가져온다는 사실과 전가적 의가 실제적 의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이전의 저작들로 인해 오해를 받을 수 있었던 부분을 보완하며 그의 칭의론을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제시한다.
---「7장_ ‘칭의론의 발전’ 」중에서
신학사를 살펴볼 때, 루터에게 쏟아졌던 비난 중 하나는 그가 실제적 의를 부정한다는 것인데, 루터는 이미 이 설교에서 법정적 의(forensic righteousness)뿐 아니라 실제적 의(effectiv righteousness)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행하는 실제적 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제적 의의 유래가 낯선 의인 그리스도의 의이고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의를 통해 우리 안에서 성화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러한 칭의 이해는 로마서 강의에서 말했던 칭의 이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칭의 이해는 같은 해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했던 갈라디아서 강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7장_ ‘칭의론의 발전’ 」중에서
루터는 이 구절의 해석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신앙은 약속에 대한 신앙이다. 이 약속에 대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단지 이성의 테두리에서 활동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본성 전체를 변화시키고 전복시키는 신앙이다. 신앙은 영적 새 창조의 수단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신앙을 통해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신다. 신앙은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이해하며 붙잡고 살며, 이성과 의심과 끊임없이 싸운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말씀에 따라 살고 움직이며 전투한다. 이런 신앙은 내가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9장_ ‘칭의론의 완성’ 」중에서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의 칭의 논쟁은 현대의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이 논쟁에 참여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칭의 논쟁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논쟁자들이 루터의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의 칭의론의 극히 일부분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전통적 칭의론을 사수하려는 학자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해당한다.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비판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영혼에게 혼란을 주고 있으므로, 전통적 칭의론을 사수하려는 학자들의 비판적 글이 계속하여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전통적 칭의론 입장을 지지하고 변호하려는 학자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사실 루터의 글을 원전 중심으로 탐구한 사람이 볼 때는, 전통적 칭의론 주장자들이 루터의 칭의론을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11장_ ‘트리엔트 종교회의 이후부터 현대까지 루터 칭의론 이해의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