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냉정하게 보아, 항구적 쇠퇴상태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인문정신의 역사는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인적 소수의 예외적인 분투에 의해 ‘겨우’ 존속해 왔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저 찬란한 르네상스 기조차, 1500년대의 플로렌스가 보여주듯이, 그지없이 잔혹했던 폭력의 시대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문제는 이 현실의 이율배반적 존속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의 점증하는 불확실은 바로 이 이율배반으로부터 자라나오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단순히 쇠퇴한다기보다는 스스로 급격히 변형되면서 이제까지 몰랐던 영향력을 얻을 수도 있다. 나는 미래의 논평 - 울림의 되울림, 재해석의 메아리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머리말을 대신하여―울림과 메아리」중에서
김우창 선생의 감성은 철학적/이론적/개념적으로 깊게 무장되어 있다. 그의 글은 한편으로 더없이 건조하다. 논리적/논증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글에서 있을 수 있는 수사를 선생은 최대한으로 배제한다. 그래서 미사여구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 글의 함의는 놀랍도록 신선하고 풍성하며 다채롭다. 이것은 다시 시적 감성의 개방성에서 올 것이다. 예술적 감수성은 철학적 성찰과 깊은 의미에서 혼융하는 것이다. --- p.399
선생의 언어는 현실의 이모저모를 두루 타진하면서도 세계의 바탕이 지닌 놀라움과, 이 놀라움을 느끼는 주체의 살아있음의 기쁨을 잊지 않는다. 사회적 교류나 인정도 중요하지만, 더 깊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홀로 있음 - 고독일지도 모른다. 고독 속에서 인간은 병이나 죽음이나 유한성 같은 아포리아와 부딪치고, 이 충돌에서 본래의 자리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삶의 기쁨과 생명의 고귀함, 신뢰와 평등과 우애 같은 가치들은 이때 실감될 것이다. 살아있는 기쁨, 살아 있고 살아가며 살아가게 될 기쁨은, 생계 현실이 아무리 급박하고 쪼들린다고 해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근본사실이다. 따라서 이 기쁨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정당한 인간 이해와 현실인식의 개선에 이바지한다. 살아있음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며 공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공동체적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 p.406
김우창의 사유는, 타자적대적 비판주의와 자기파괴적 금욕주의 중 어느 한 쪽으로 경사됨 없이, 다시 말해 비판적 성찰과 금욕적 절제 사이를 오가면서 향유의 쾌락적 차원까지 포괄한다. 이것을 나는 ‘반성적 이성의 향유방식’ - ‘반성적 향유’라고 부르고 싶다. 이 반성적 향유의 사유법 아래에서 이성은 사라지지 않기에 비판은 계속되고, 이 비판적 검토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견지되기에 일상의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성적 향유는 회의하되 기뻐하고, 즐기되 또다시 질의하는 까닭이다. 깊은 향유에는 감성과 이성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발적 윤리의 즐거운 나날을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김우창 저작의 궁극적 지향은 아마 ‘어떻게 인간이 윤리적 결단을 통해 품위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의 전체에 공감하면서도 이 현실을 비판하고, 이런 비판 가운데서도 공감의 기쁨을 여전히 누리면서 그 기쁨을 독자로 하여금 향유케 한다. --- p.407
학문과 사상의 길에서 남는 것은 아름다움과 자유의 길일 것이다. 그 미와 자유의 길을 걷는 것은 어떤 이념이나 특정이념을 내세운 민족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뛰어난 개성 - 보편적 가치를 구현한 개성일 것이다. 보편적 개인은 근대적 의식의 육화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 학문사/지성사/예술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공감이며, 흑백으로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공감 속에 감정과 사고를 부단히 쇄신하는 일일 것이다. 실천의 가능성은 이렇게 쇄신된 사고와 감정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지속적 공감은 자의적 구분에서 야기되는 크고 작은 갈등을 이미 완화시킨다. 사람 사는 세계가 놀라운 것이고 이 놀라운 세계에 상응하는 것이 공감의 능력이라면, 삶의 기쁨도 이 공감의 능력으로부터 생긴다. 삶에 오래가는, 그래서 참으로 신뢰할 만한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공감의 기쁨일 것이다.
--- p.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