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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논, 밤 그리고 봄의 햇살

카논, 밤 그리고 봄의 햇살

정해연 | 가하 | 2010년 03월 0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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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3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412g | 128*188*30mm
ISBN13 9788993883176
ISBN10 8993883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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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괴롭다면 이번 연주회에서 카논을 뺄 수도 있어.”

그를 보는 서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이젠 아무것도 남김없이 용서하고 싶어요. 다 내려놓고 싶어.”

그녀의 말에 환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너무나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환은 말없이 서현을 일으켜 세워 그녀의 방으로 이끌었다. 서현의 방에는 붉은색 오디오가 있었다.
환은 차분한 태도로 서현을 침대에 앉힌 후 CD가 꽂혀 있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의 일로 방은 조금 어질러져 있었지만 CD는 연주자별로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잠시 후 환은 CD 한 장을 골라내어 오디오에 넣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른 그는 조금 전보다 빠른 걸음으로 서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음악은 시작되었다.
서현의 어깨가 흠칫 오므라들었다. 환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서현의 손을 꼭 쥐었다. 그에게 잡힌 손가락이 여리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음악은 점점 진행되었고 서현의 떨림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 사이로 신음 같은 소리를 뱉었다.

“그, 그만.”

“아니. 더 들어.”

환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대로 물러서게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웅크리게 할 수 없었다. 근래 며칠간 서현이 보여주었던 그 밝은 미소를 지금 이 순간의 고통으로 지켜낼 수만 있다면, 환은 조금 더 자신이 잔인해져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새……, 생각나. 그만. 그만!”

서현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는 놓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들어! 네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사랑한 음악이야!”

환의 고함에 서현의 요동이 멈추었다. 서현은 애원하는 눈으로 환을 올려다보았다.

“최서현. 너도 음악 하는 사람이지? 어느 날 한순간에 네게서 음악도, 사랑도, 그리고 신체의 일부까지 모두 빼앗아버리면 어떨 것 같니?”

“하지만,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 이 세상에 버티고 살려면 그네를 묶고 있는 밧줄처럼 자신을 지탱해줄 무언가가 필요해. 하지만 네 어머니는 그 줄 중에서 세 개가 끊어졌어. 음악을 잃었고, 평온한 가정을 잃었고, 자신의 팔을 잃었어. 그리고 너 하나가 남은 거야!”

환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음악을 멈추려고 발버둥치는 서현을 설득하려는 듯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환은 곧 격정적으로 들먹거리는 가슴을 어렵사리 가라앉혔다.

“줄이 끊어진 그네는 마지막 남은 그 한 줄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려야 해. 그 줄이 버겁든 말든.”

어쩌면 지금 그가 뱉는 말은 궤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환은 그렇게 해서라도 서현에게 남아 있는 그 원망을 씻게 해주고 싶었다.

“넌 어머니를 용서하고 싶다고 말했어.”

“나도 그러고 싶어요. 아니, 어머니는 분명 용서했어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이젠 원망스럽지도 밉지도 않아요. 하지만 무서워요. 무서운 기억이 떠올라서 미쳐버릴 것……!”

서현의 눈물 섞인 그 말은 미처 끝을 맺지 못하였다 잘려버린 그녀의 고통스러운 말이 환의 입 속으로 사그라졌다.

“우읍!”

갑작스러운 환의 입맞춤에 서현은 그의 어깨를 밀쳤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환은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고 입술을 밀착시켰다. 그녀가 밀어낼수록 더욱 거칠게 입술을 부딪쳤고, 그녀가 도리질을 칠수록 더 파고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환의 어깨를 탕탕 치던 서현의 작은 주먹이 점점 힘을 잃어갔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도리질도, 저항도 힘을 잃어갔다.
환의 격정적인 입맞춤이 부드럽게 변해갔다. 닫힌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고 삼켰다. 그 순수한 눈에서 파생된 눈물이 환의 얼굴에 묻어날 때쯤, 환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뜨거운 숨이 서현의 호흡과 섞인 순간, 환은 자신의 팔을 꼭 쥐는 서현의 손길을 느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서현은 눈앞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하얗게 채워진 것은 자신의 머릿속인지도 몰랐다. 거칠게 부딪혀 와 고통스럽던 그의 입맞춤은 이제 마치 포옹하듯 그녀를 감싸 안았다.
지금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안도였다. 서현은 부드러움으로 점령하는 환의 입술을 더욱더 절실히 원할수록 자신의 귀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카논의 선율을 들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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