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지었다는 [상서]나 중국에서 최고 권위 있는 역사서로 인정받고 있는 [사기]에는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 한자를 처음 만들었던 상나라(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상나라(은나라) 사람들이 피지배층으로 살기 싫어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를 중심으로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그 기록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있고 역사학자들 역시 일반적으로 그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 기록이 일정 부분 사실인 것을 연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상나라(은나라)는 기록상 하나라를 이은 중국의 두 번째 왕조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 기원이 발해만 북부, 즉 요녕(랴오닝)지역에서 발원하였으며, 민족 구성 역시 동이족으로 밝혀진 나라입니다.
발해만 북부 지역은 고대 고조선 서부지역으로, 중국 최초의 국가 형태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며, 동아시아의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이끈 문화 선진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고조선과 상나라가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나라는 이후 중원을 점령하였다가 멸망한 뒤(BC 1046) 다시 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상나라가 망하여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은 상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주한 상나라를 ‘기자조선’이라고 합니다. 기자조선의 기자(箕子)는 상나라 왕손으로 조선으로 이주한 상나라 망명인의 대표를 말합니다.
고조선 땅 서쪽으로 돌아온 상나라 후손들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강국인 연나라와 다투다가 패하여 BC 3세기에 동쪽으로 2,000여 리나 후퇴하게 됩니다. 이때 연나라에 패망한 고조선 서쪽 지역 사람들은 중국 동북 지역(만주)과 한반도로 대거 이동하게 됩니다. 중국의 권위 있는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동쪽으로 이동한 ‘고조선 왕’이 바로 상나라 왕손이자 상나라 유민의 대표인 기자의 41대손인 기준(箕準)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통해 중원에서 한자를 만들었던 상나라 후손들이 한반도와 만주까지 대가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무덤 양식, 청동기 등 고고학적 자료들로도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기자의 후손이 다스리던 고조선(기자조선)은 이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찬탈하였다가(BC 2세기 초) 다시 한(漢)나라에 멸망하는데(BC 108), 한나라가 고조선 땅에 설치한 새로운 행정구역인 낙랑군은 한반도 동남부의 신라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나라로서, 낙랑군 사람들은 중국, 고구려의 압박 속에 지속적으로 신라에 유입이 되어 그곳의 지도적인 세력이 됩니다. 이와 관련해 3세기 편찬된 중국 정사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전신인) 진한 사람들은 낙랑 사람들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동방 사람들은 ‘我(wo)’를 ‘아’로 발음하므로, ‘아잔’이라는 말의 뜻은 낙랑에 ‘자신들이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한반도는 한자를 만든 상나라, 상나라를 이은 기자조선, 기자조선을 이은 낙랑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는데, 한반도뿐 아니라 만주에도 한자를 만든 상나라와 유사한 풍습을 가진 민족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부여’를 들 수 있습니다. 부여는 상나라 멸망 이후 1,000년이 넘게 상나라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상나라와 같이 ‘흰색’을 숭상했으며 당시 중국과 달리 두 무릎을 꿇고 공손함을 표하는 등, 여러모로 상나라와 닮은 나라였습니다.
만주에 살던 상나라 풍습을 지닌 민족들 중 스스로 상나라의 후예라고 자처했던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예맥족인 선비족입니다. 선비족은 만주 서부에 거주하던 민족인데, 이후 중국을 점령하면서 스스로를 상나라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고(《위서》), 현대 중국학자들 역시 선비족을 상나라 이주민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자신들과 같은 예맥족 국가인 부여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4세기부터 중국 고대문명의 핵심 지역인 중원을 점령하여 다스립니다. 선비족 중 세력이 강했던 모용씨 부족은 연나라를 건국하여(337) 중원을 점령하였는데, 점차 다른 선비족 일파인 탁발씨 부족에 밀리면서 자신들의 기원지인 고구려에 나라 전체를 들어 투항하게 됩니다(436). 그런데 그 투항한 규모가 대단했기 때문에 고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문명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자리하게 됩니다. 선비족이 고구려에 투항한 뒤 백제와 신라, 일본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필자가 쓴 《동이 한국사》에 상술하였습니다.
신라시대 중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국제적 석학인 최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진한(신라)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곳이다.” (《삼국유사》)
신라의 주요 세력이 연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연나라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대대로 중국 동북 지역에 있던 강국이었는데, 기원 이후 선비족이 국호를 ‘연’으로 정하고 중원을 점령했다가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한국 역사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 나라입니다.
이렇듯 한자를 만든 상나라, 한자를 통일한 진(秦)나라, 상나라를 이은 낙랑, 상나라와 풍습이 같았던 부여, 부여를 이은 백제, 상나라 유민의 대표인 기자를 신으로 섬겼던 고구려, 상나라를 시조로 삼고 중원을 점령했다가 고구려에 투항한 선비족의 연나라, 그리고 진(秦), 낙랑, 연나라 이주민이 대거 유입된 신라, BC 3세기부터 꾸준히 중국과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왜(일본) 등은 모두 고대 중원 문명과 관련이 깊은 나라들로, 우리와 혈연, 정치, 문화, 역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고대 중원 문명과 한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별개로 나눌 수 없는 공통분모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에 고대로부터 한자와 관련된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