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아리 후배 쾌순을 좋아했지만,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짝사랑하고 있었다. 입대만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사귀자고 말이라도 꺼내봤을 거다. 곧 군대 갈 놈이 차마 연애수작 걸 염치가 없었다. 사실 두렵기도 했다. 괜히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면 짝사랑도 못 하게 될까 봐.
나는 손을 내밀었다.
“왜요?”
“잘 가라고 악수도 못 해줘?”
쾌순은 빨강 파랑 검정 색깔의 매직펜 똥이 적절하게 묻어 추상화가 그려진 것 같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쾌순의 손을 잡았다. 꼭 쥐었다. 쾌순의 손을 잡을 때마다 맛보는 일인데, 정전기가 찌릿찌릿 흘렀다. 정확히 삼백여섯 번째로 잡아보는 쾌순의 손바닥이었다. 택견을 하다 보면 제법 손잡아볼 일이 있다. 자세를 바로잡아준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손잡아본 게 일단 이백오십 번이다.
마지막으로 잡아보는 손일 테다. 제대하고 복학하면, 쾌순은 학교에 없을 테니까.
쾌순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원래 눈물이 많은 애다. 울음소리는 절대로 안 냈지만. 택견 동아리 훈련 때도 눈물을 달고 다녔다. 나는 대놓고 놀리기도 했다.
“한총련 운동 할 때도 그 모양이지? 너처럼 눈물 많은 애가 무슨 ‘민족자주 노동해방’을 한다는 거냐? 최루탄 한 번 맞으면 눈이 남아나질 않겠는데!”
이번 눈물은 독한 매직펜 향기 때문일 테다. 대충 쓰지. 민자당 놈들은 절대로 안 읽을 대자보를 뭐 그리 열심히 쓰냐? 눈물만 아깝게. ---pp. 22~23
‘오공막사’라는 곳으로 집합이 걸리면 “오늘은 맞아 죽었구나!”가 선입감이었다. 요가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이 도구 타격이었다. 농기구 창고에 왜 오공막사라는 별칭이 붙었는지 알쏭달쏭했다.
아무튼 오공막사에는 각종 농기구가 있었고, 나무든 쇠든 자루 달린 것들은 죄다 방망이로 변했다. 삽, 해머, 괭이 등 손에 잡히는 게 죄 ‘군기의 매’로 돌변하는 것이다. 타격이 5공화국 통치 수준만큼 혹독해서 오공막사라 불렸던 것일까? 단순하게 오공(蜈蚣, 지네)이 우글거렸기 때문일까?
고참들은 자기들이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같은 갈굼’이라고 했다. 나중에 나도 졸병들 갈굴 때 그랬다.
“야, 강아지똥 섀끼들아, 나 당할 땐 거의 개죽음이었어. 근데 난 거의 안마해주고 있다!”는 식으로.
---p.126
사람이 살려면 그렇게도 사는 모양이었다. 수천 킬로짜리 천장에 깔려 쥐포가 되었어야 마땅할 중대장, 살려고 보니 벽 잔해물과 천장이 기가 막히게 개구멍만 한 삼각형을 하나 만들었고, 중대장은 거기에 꼭 끼어 있었다. 철모 쓴 중대장 얼굴은 벽과 땅 사이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일단 본부에 헬리콥터를 요청할 셈이었다. 내가 “현망에 병아리 병아리, 귀소가 어미닭 어미닭(여기는 철거반인데 본부 나와라!)……”까지 다급히 말했을 때,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사고를 알리지 마라!”
중대장이 밖으로 삐져나온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던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 와중에 피식 웃었다. 중대장은 다시 한 번 간절히 외쳤다.
“나의 사고를 알리면 너부터 죽는다. 제발 부탁이다!”
이해는 간다. 나라 지키는 큰일 하다 다친 게 아니고, 소초 까는 데 얼쩡거리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알려져 봐라. 진급 관련 점수 깎이는 것 둘째 치고 쪽팔려서 못 살 테다.
“상태가 어떠십니까? 살 수 있겠습니까?”
질문이 이상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중대장은 나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에 재수 없이, 개구멍에서 꺼내는 사이에 중대장이 죽어봐라. 구급 헬리콥터가 왔다고 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손 치더라도, 나는 본부에 연락 안 했다는 죄로 크나큰 고초를 겪을 수 있었다.
중대장이 어쨌든 크게 안 다치고 살 수 있다면, 나의 무전 연락은 중대장의 경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테다. 내 처지를 생각하면 무조건 무전을 때려야 했고, 중대장을 생각한다면 어찌해야 옳을지 헛갈렸다.
중대장이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고함질렀다.
“나는 안 죽는다!”
“죽으시면 책임지십쇼!”
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뭐라고 뭐라고 시끄러운(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뭐하고 자빠졌냐는) 무전기에다가는 “귀소측 감도 네 개 네 개 이상(본부 무전기 소리 겁나게 잘 들린다)!”라고 했다. ‘중대장 구출하기’에 돌입했다. 우리 열 사람의 힘으로는 천장 벽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중대장이 인솔해 온 중대원들을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밑에 깔린 중대장을 놔두고 천장 벽을 쪼개겠다고 해머질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중대장 턱 밑을 팠다. 중대장 얼굴 아래로 굴을 파고들어갔다. 바위 밑자락으로 파고든 칡뿌리 캐는 것 같았다. 역시 삽질이 최고였다!
가까스로 중대장을 빼냈다. 피 흘린 산삼 같은 자태였다. 상체는 괜찮은 것 같뫀데 하체는 온통 피칠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곧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제야 그 중대장의 부하들이 나타나서 경악을 했다. 어떤 미친 중대원 놈 하나가 “구급차 불렀냐?”고 했다. 그 중대장 밑에 그 중대원이시다. 오토바이도 못 올 산골짜기에 무슨 구급차를 부르라는 거야. 내 뜨악한 얼굴을 보더니, 나보다 계급이 높았던 중대원은 “시발새꺄, 헬리콥타 불렀냐고?”로 정정했다.
중대장이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울먹이며 뇌었다.
“내가 부르지 말라고 했다!”
중대원들은 긴 나무 막대기 사이에 포대를 끼어 만든 들것에 중대장을 실었다. 중대장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에 가까웠다. 군대에서는 흔히 단까(중국어 담가 擔架의 일본어 발음)로 불리는 들것 하나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라 세 개를 포갰다.
중대원 중 가장 빠른 병사는 약 1킬로미터 산속 길을 지나고 다시 약 1킬로미터의 모래밭을 지나면 있는 방파제 인근 민박집으로 달려갔다. 그 민박집은 사고 지점으로부터 일반 전화가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인 동시에 119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119와 중대원들은 각각 빈 간이침대와 중대장 실린 들것을 들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에서 만나자마자 모두 퍼져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으로 이송된 중대장은 전치 8주밖에 안 나왔단다.
중대장의 부상 사유는 수색훈련 도중 솔선수범하다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것으로 정리되었다. 포상도 받았다! 중대장은 우리 작업반의 입을 막기 위해서인지 목숨을 구해준 것이 고마워서인지, 포상휴가 나가기 전에 집합을 걸더니 냉동식품을 잔뜩 사주었다. ---pp.179~183
나는 병장 단 이후로는 졸병에게 손을 대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몇 달 전 상병을 달고 있을 때는 졸병들을 무지하게 타격했다. 나는 주먹이나 발로 때리기보다는 택견 기술을 사용했다. 뛰어올라 무릎으로 타격하는 것이었는데, 졸병들 사이에서 ‘택견씹새’라고 악명이 대단히 높았다.
더욱이 하필이면 나랑 한 조가 된 이병 녀석은 나한테 제일 많이 맞은 녀석이었다.
사람 눈이 그렇다. 겉만 보고 딱 어떻다고 판단해버린다. 그것도 모두가 똑같이. 녀석은 객관적으로 행동이 굼떴고, 주관적으로 자대 온 날부터 엄청 빠져 보였고, 며칠 생활해보니 ‘개념’조차 없었다.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라 고참들이 전부 그렇게 봤다. 그런 선입견을 뒷받침하는 사고도 쳤다.
내무반에 들어온 지 일주일 되었을 때다. 녀석은 당연히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병장 하나가 녀석에게 외쳤다.
“거기 딸딸이 좀 줘라!”
슬리퍼를 가리키는 말이 왜 딸딸이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경상도 사투리인지 군대 전통 말인지. 하지만 모르는 것도 죄다. 녀석은 당황해서 멀뚱히 병장을 쳐다보았다. 병장이 다시 한 번 요구했다.
“딸딸이 좀 주라고.”
순간 녀석이 피식 웃어버렸다. 모르는 것도 죄인데, 제가 알고 있는 다른 것으로 바꿔 생각하기까지 했다.
사실 녀석은 죄가 없다. 얼마나 웃겼겠는가? 병장이 자기한테 딸딸이 쳐보라는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쳐 보일 수는 없고 웃을 수밖에. 그러나 군대에서는 왜 웃었는지 묻지 않는다. 자대배치 일주일밖에 안 된 놈이 병장이 뭐 달라고 하는데, 딴생각하며 웃기나 했다는 죄로 맞아야 할 뿐이다. 녀석은 그때부터 딸딸이 이병이라고 불렸다.
“딸딸아, 되게 무섭지?”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이 총으로 꼭 공비를 잡아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시발, 우리 지금 매복하고 있잖아. 개섀끼야, 왜 소리를 빽빽 질러! 정말 더럽게 개념 없네!”
---pp.21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