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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리얼리즘의 시학

서정적 리얼리즘의 시학

[ 양장 ] 푸른사상 평론선-29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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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3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160*234*38mm
ISBN13 9791130810867
ISBN10 113081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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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진희
문학평론가.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세종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전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유치환 문학과 아나키즘』, 『문학과 존재의 지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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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란 매 순간 어떠한 힘과의 마주침을 경험하는 것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어떠한 힘’이란 넓은 의미에서의 타자-자아를 포함한-혹은 그 총체로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힘이라 한 것은 마주침의 대상이 단순한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포지하고 있는 확정되지 않은 의미들이기 때문이다. 인식 주체의 사유 내지 진리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 타자와의 마주침을 근거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매 순간’이라 했지만 자아에게 매 순간 주어지는 것은 마주침이라기보다는 마주침의 기회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터, 마주침이란 타자가 자아의 인식 범주 내로 들어왔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 마주침이 아닌 내면의 파동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자아의 세계는 이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주름에 의해 구성되고 또 생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타자는 자아의 내면에 어떠한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는 물화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 도구화된 이성에서 기인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후 신이 물러난 중심에 인간이 자리하면서 인간 이외의 것들은 철저하게 주변화되어왔다. 이 인간중심주의가 극도의 자본주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이성은 비판과 성찰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채 도구화되었으며 그 결과 세계는 경제적 환원주의, 목적지향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윤 창출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중심을 자본에 내어주고 인간 자신도 소외되기에 이른다. 자본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였지만 타락한 이성과 팽창하는 인간의 욕망은 인간 본위의 목적성을 상실한 채 자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이성중심주의가 물질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심각한 수준의 환경 파괴를 비롯하여 전쟁과 학살, 테러, 억압, 인간의 상품화 등등 그 역기능은 가히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드러나고 있다. 타자의 소외 내지 물화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셈인데 상황의 개선은 요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 까닭은 가속화되는 인간 욕망의 팽창과 재생산이 관념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회 구성원이 제도권하에서의 안위와 선진 산업사회가 부여하는 물질적 충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포박되어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협력자로 기능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회의 변혁은 부정될 수밖에 없으며 변혁을 위한 갈등 또한 허용될 리 만무하다.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가 시인이라 할 때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응전의 태도야말로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시인의 본령이 아닐까 한다. 우리 시단에는 이미 70년대의 참여시라든가 80년대의 해체시, 90년대의 생태시 등 현실이 위기로 인식될 때마다 나름대로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며 사회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해온 역사가 있다. 사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물질적 향유의 수준이 향상되고 정치 경제적 권력의 횡포와 부조리가 보다 은밀해졌다뿐이지 70년대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예술이란, 세계의 불행을 인식하는 데서 그 자신의 행복을 갖는다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객관적 불행의 현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사유토록, 그리고 참된 것을 탐구하도록 추동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2014년 첫 비평집을 낸 이후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두 번째 비평집을 낸다. 2년여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참으로 여러 시인들을 만났다. 비평도 창작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이 없으면 비평도 없다. 시가 먼저라 생각하고 그 시들을 최대한 성실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시정신이랄까, 작품을 관류하는 중심 같은 것과 마주하게 되는 시점이 생기고 그것과의 교호를 통해 형성되는 주관적인 담론이 나의 비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시인들은 부단히 타자를 호출하고 있었다. 소외된 존재에의 동화, 존재에 대한 물음, 구원에 대한 염원 등이 그것이다. 이는 경제적 환원성이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전혀 쓸모없는 것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불행은 바로 이 쓸모없는 것들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는바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사유하고 탐구하는 것은 현대 시인이 포지해야 할 시정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정신은 본연의 이성을 되살리고 현실에서 삭제되어가는 가치들을 복원하는 맥락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현실을 사유하면서도 또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포회하게 된다.
또 하나, 현장에서 만난 시인들은 시대를 빗겨가지 않지만 그 응전의 방식은 비판과 냉소, 해체보다는 동화와 공감, 연대의 그것에 기울어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절망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고 그로 인한 상처와 분노, 불신이 산재해 있지만 그것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잊혀지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의 저변에 포진하고 있는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비판과 저항의 진정성은, 그리고 그 힘은 바로 타자의 슬픔에,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과 그 정신에서 담보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타자에 대한, 세계에 대한 사랑에서 연원하는 비판적 이성이야말로 구원에 대한 가능성을 함의할 수 있는 정신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감수성에서 구현되는 시적 의장을 서정적 리얼리즘, 비판을 함의하고 있는 서정성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절망적 현실에서 시란, 때때로 한없이 무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타자와의 상호 동일성을 본령으로 하는 시(詩)와 그 시정신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고귀한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남게 하는 요체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시에는, 시인에게는 힘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무력’한 존재이기에 가능한 힘이.
---「책머리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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