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단 한 군데뿐인 산호 모래 바닷가 서빈백사(西浜白沙)의 그 서럽도록 파아란 쪽빛 바닷물결에 발을 담그고 한참이나 파도를 희롱한 건 막내였다. 장마비에 질려 여행각은 다 빠져나간 뒤였는지라, 그 반나절 동안 희한하게도 백사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가락 사이로 서걱대는 산호모래의 촉감과 지중해의 쪽빛이 부럽지 않을 파아란 바닷물결 위로 물새 한 마리가 긴 그리메를 남기고 날고 있는 풍경...... 그 속에서 막내는 동화 속의 실루엣으로 떠 있었다.
그렇게 길을 튼 후 난 성산 일출봉 보다는 우도를 탐하기 시작한다. 아예 일출봉 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고 쫓기듯 도항선에 올라 우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일출봉은 섭지코지에서 보는 맛과 함께 우도의 자연 전망대인 쇠머리오름에서 일견하는 맛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차라리 서러운 쪽빛바다 서빈백사」중에서
파도와 오름과 풀잎들, 벌레들과 번민과 증오, 그리고 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외로움을 처절히 세울 때, 내 비로소 자유와 예술의 등 굽은 몸뚱아리에 향유를 바를 수 있었노라고, 결국 제주도는 사랑이었다고, 소름 끼치는 그리움이라고......
일출봉을 바로 코앞에 두고 굳이 코지로 달려 오냐면, 숲 구경은 먼 발치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일출봉을 오를 일이 없는 게 아니다. 한참이나 다리품을 팔아 정상과 만나니, 분화구 안 점점이 노루가 노니는 풍경이 절경이긴 했다. 허나 일출봉을 후리는 제맛은 이렇게 코지쯤 거리에 멀찌감치 나앉아 못 본체 힐끔거리는 것이다.
마음에 둔 미인이 있더라도 코앞에서 얼쩡거리면 껄떡쇠로 외면당하는 법이다. '네 자랑이 크면 얼마나 크더냐? 난 일 없다!"하듯 은근한 수작이어야 미인의 콧대도 조금은 수그러드는 법이다. 그런 의연함으로 일출봉의 속살까지를 훔치려 해보라! 일출봉의 치맛자락에 쑤욱 허연 손목을 디미는 파도의 수작질이며 앵돌아앉아 금방 '바다 이내'를 피워 올리는 일출봉의 토라짐마저 보일 것이다.
아쉬운 건 바람이다. '일출봉의 치맛속까지 후리리라!'고 달려드는 거센 바람이 있는 날이 아니어서 아쉬운 것이다.
---- 「섭지코지, 한 발 비껴섬의 여유」중에서
무릇 이루어진 사랑에는 '옛'을 붙이지 않는 법이니, 옛사랑은 결국 풋사랑과 닮아 있다. 다시금 그 시절이라면, 그 어떤 불구덩이라도 헤쳐 '삼단 같은 네 머리채' 놓치지 않으련만, '하는 일이 그저 어리기만 한' 시절의 일이라 아뿔싸 '옛'이 되고 만다.
아, 사랑하는 사람들아! 우리는 이러자꾸나. 그 상실의 아픔에 급기야 눈까지 멀고, '겨울은 지나갔지만, 봄도 없구나!'라고 노래하며 기다림으로 한 세월을 다 지워버린 '솔베이그'처럼 하지는 말고 아예 애초부터 창을 활짝 열 일이다.
"그대들은 옛사랑이나 뒤적거리며 사세요, 나는야 '지금 사랑'이랍니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지금 사랑'이랍니다." 라고 입을 앙다물면서 옆 사람 손을 꼬옥 잡자. 그리곤 복사꽃처럼 붉은 열정일랑 아껴둘 일 아니니, 지금 서로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다 주거니받거니 할 일이다.
사랑은 '지금 사랑'이 더 좋다.
---- 「나는야 '지금 사랑'이 더 좋다」중에서
제주! 사랑의 열기에 들떠 날밤을 하얗게 새우는 '익은 사랑'일 때는 섬과 열애에 빠졌다. 차귀도, 비양도, 우도, 추자도, 마라도까지를 훑고 매만지고 보듬어 안곤 했다.
그 해 여름 마라도, 해국(海菊)이 잔별처럼 무리져 흐르던 등대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난 그만 무릎을 꺾고 그 앙증맞은 해국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이 가고, 섬들은 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 「용눈이오름, 강바람에 넋을 놓치다」 중에서
남도의 저녁 해, 농익어 가는 유자열매 향이 삽상한 바닷바람에 실려 감미롭기만 한데, 나그네의 가슴을 턱턱 막히게 하는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소록도 앞바다, 자는 듯 잠잠한 저 잔물결을 타고 시인의 보리피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끼다비 벗어 놓고 남은 두 발가락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인의 턱에 받친 가쁜 숨이 들리는 듯하다.
--- 「소록도에서 듣는 보리피리 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