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애가 오카리나라니, 너무나 감성적이었다. 착하고 순수하게 빛나는 수앙의 눈은 그처럼 감성적일 수밖에 없는 내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수앙을 좋아했지만, 수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겁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수앙 쪽을 쳐다봐야 할 때면 일부러 딱딱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키 크기 체조를 시작했다. 작은 것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수앙이 너무 컸으니까. 큰 키를 줄이는 것보다는 작은 키를 늘이는 게 훨씬 쉬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 p.24
“사실은 말이다, 코끼리는 할머니의 연인이었단다. 이름은 키비 에로넨, 핀란드에서 온 여행자이자, 이모의 아빠란다. 코가 이렇게 크고 엄청 뚱뚱해서 코끼리라고 불렀지.”
엄마는 조용조용 말했지만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연인, 키비 에로넨, 핀란드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에 비비총알처럼 콕콕 박혔다. 그러니까 코끼리를 찾으러 가겠다던 이모의 말은 아빠를 찾으러 가겠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모의 아빠라니.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의 존재가 해일처럼 몰려와서 내 가슴을 흔들었다.
--- p.27
그리고 가만히 가슴속을 들여다보았는데, 웬걸, 거기 난데없는 코끼리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놀라서 코끼리를 들여다보았다. 내게 존재를 들킨 코끼리는 쑥스럽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모처럼 파란 눈을 가진 코끼리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비가 내린 뒤 쑥쑥 뻗어가는 덩굴식물처럼 코끼리는 가슴을 채울 정도로 자랐다. 이봐, 그만 부피 좀 줄여줄래? 난 별로 크지 않거든. 나는 내 속의 코끼리를 향해 투덜거렸지만 코끼리는 마침내 배와 목을 넘어서 머리까지 침범했다. 기다란 코끼리의 코와 네 개의 다리가 덩굴손처럼 내 힘줄과 근육을 붙들고 있었다. 으아아! 이게 뭐람! 코끼리가 날 점령했어. 나는 놀라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열심히 중얼댔다. 잊어버려야 해. 코끼리 생각을 하니까 코끼리가 생겨난 거야. 나는 한사코 코끼리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 p.60~61
할아버지 사진이 엄마 수첩 속에 간직되어 있어야만 했던 까닭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아서 내가 약간 침울해진 사이, 엄마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완전 모르는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숙자가 두 살 무렵, 말을 하기 시작하던 해 크리스마스였어. 나는 숙자를 안고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지. 그리고 문득 숙자 아빠가 사는 곳을 핀란드로 설정해버렸어.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굴뚝을 타고 들어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나눠준다는 산타클로스가 핀란드 북부 지역 라플란드에 있는 코르바툰투리 산에 산다는 걸 그때 첨 알았거든. 또 거긴 아주아주 먼 곳이니까 숙자가 자라서 아빠 찾으러 가겠다고 나설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참 바보 같았지 뭐니.”
--- p.99~100
“작가라는 건 말이다, 공부하듯이 열심히 수련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단다. 코끼리 이야기를 꾸며대는 걸 보면 네겐 충분히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상상력이라는 재능 말이다.”
엄마는 진지했지만 나는 더 이상 진지해질 수 없었다. 상상력이라면 아무래도 코끼리라는 엄청난 농담을 만들어낸 엄마에게 더 많을 것 같았다. 이모의 아빠를 코끼리로 설정한 사람은 엄마였고, 엄마의 설정에 따라 할머니는 코끼리의 존재를 이모의 마음에 심어주었으니까. 내가 코끼리를 받아들인 것도, 이모가 코끼리를 찾아 머나먼 핀란드까지 가게 된 것도 엄마의 순수하고 다정한 상상력 덕분이었으니까.
“작가가 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엄마예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뭐라고? 원 농담도!” (175~76쪽)
“코끼리는 없어! 너도 알잖아! 그런데 이게 무슨 난리냐고!”
나는 놀라서 할머니를 꼭 껴안았다. 톤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엄마가 주먹을 꽉 쥐고 이모 앞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이모가 휘청 균형을 잃는다 싶더니, 야단맞은 원숭이처럼 스르르 엄마 쪽으로 기울었다.
“그, 그게 말야, 언니……”
“크게 말해! 너, 목소리 크잖아! 크게, 코끼리는 없다고 말해!”
코끼리가 없다고 말하라니. 그렇게 코끼리 이야기를 해대고선 이제 와서 무슨 일이람. 나는 엄마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거짓말을 수습하려고 저렇게 막무가내라면 정말 유치하다고. 이모에게 코끼리를 만들어준 건 엄마고, 그러니까 이모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그래서 엄마에게 뭔가 항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할머니,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어떻게 된 거예요? 하는 심정으로. 그러나 할머니는 절반쯤의 방긋 웃음을 희미하게 머금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엄마에게 쾿전 기울어진 이모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없어! 코끼리는 없어!”
--- p.242~43
고등학교 때 여름, 초저녁부터 줄곧 번개와 천둥이었는데 비는 내리지 않았다. 진하고 옅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는 가운데 귀기(鬼氣) 서린 빛이 대기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마칠 때까지 번개와 천둥은 계속됐고, 무서움에 떨면서 아이들은 종종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호들갑스런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내닫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다른 아이들은 무섭다고 야단인데 무섭기는커녕, 요즘 말로 악지르고 싶었다. 보통 때와는 다르게 파르스름한 밤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징조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그때 나는 시골에서 그보다 번화한 작은 도시로 유학한 처지라서 현실감각이 없었는 데다, 지금 아이들처럼 뚜렷한 장래 계획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막연하고 두렵기만 한 인생을 앞에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정규수업과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에다 주초고사, 주말고사, 모의고사, 월례고사로 꽉 짜인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면서도 상상, 꿈, 환상 같은 것들에 좀 몰두해 있었다. 막막함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기만을 바라던 참 대책 없는 아이였다.
아무튼 그날, 이상한 일기에 잔뜩 취한 채로 나는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며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뭔가를 나름 끄적거렸다. 새벽, 기압골은 안정을 되찾으면서 비가 몹시 내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하늘은 말짱했고, 세상은 당연하게도 달라진 게 없었다. 마른번개와 마른천둥은 기온과 밀도가 다른 공기덩어리가 만나면서 전선(前線, front)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자연에서는 흔한 현상이었을 뿐. 나는 몹시 실망하면서 학교에 갔다.
아직도 가끔, 비가 오거나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그때가 생각나서 혼자 멋쩍게 웃는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보충과 야자는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인생의 방식은 왜 변하지 않는 걸까? 여전한 세계, 여전한 암담함 속에서 이렇게 계속 변화와 사랑을 꿈꾸어도 되는 걸까? 내 마음속에 몰래 감춰뒀던 코끼리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줘도 괜찮을까? 망설임 끝에 못생기고 키 작은 영은이의 비정상적인 가족이 ‘코끼리 농담’을 통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소설을 쓰는 내내 관찰 대상이었던 이 땅의 많은 영은이와 여진이, 이숙자와 이혜자, 그리고 수앙 들에게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 모두를 껴안아준 할머니, 당신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