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매우 독특하다. 법이 정신분석학과 만나기도 힘든데, 영화와도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서구의 학계에서는 이 셋 가운데 어느 둘의 만남, 그러니까 『영화와 정신분석학』, 『법과 영화』, 또는 『법과 정신분석학』이 만난 경우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 책처럼 그들 셋이 동시에 만나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다. 이렇게 법과 영화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함께 하는 작업은 학문적으로 무엇을 생성시킬 수 있을까? 누구나 지적 호기심과 흥분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첫째, 우선 법이 정신분석학을 만나는 것은 국민참여재판의 시행으로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된 법심리학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심리학계와 의학계에서 줄곧 외면되어온 정신분석학은 단지 재판대에 선 피고인 개인의 정신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 정신분석학과 법이 함께 작업할 때, 법의 무의식에 억압된 욕망의 지층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식화는 근대사회 이후 이성과 합리를 좇은 법의 그림자가 인종청소나 집단학살과 같은 파괴적인 모습으로 현실화되지 않도록, 인간과 법의 정신의 건강함을 돌보는 데 꼭 필요하다. 둘째, 법과 영화가 만나는 것도 매우 생산적이다. 이는 법과 문학이 만났을 때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둘의 만남은 단지 문학 속의 법담론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영화가 법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수단이 되고, 법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영화 속의 법’ law in cinema) 외적 교류에 그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할리우드 영화들이 취하는 단정적인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법이 배워오는 것은 더더욱 우리의 기대와 멀다. 물론 법이 말하는 진실이란 ‘영화적 구성물’일 수 있다는 최근의 인식론적 성찰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법과 영화의 만남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법이 정신분석학적 성찰을 통해 갖게 된 자기의식을, 언어에 의한 복잡한 논증을 거치지 않고도, 영화적 감동과 함께 단번에 모든 관객들이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의 논리보다 오감과 육감이 발달한 한국인에게 영화는 어쩌면 법이 자기를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셋째, 이렇게 정신분석학이 법을 만나고, 법이 영화를 만나면, 영화가 정신분석학과 만나는 방식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을 가질 수 있다. 종래 정신분석학적인 영화비평은 영화를 통해 정신분석학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는 설명적 비평이거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영화가 주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관객이 영화에 의해 피학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조작하게 되는 현상이나 영화가 관객의 억압된 충동을 활성화시키는 현상이 비판될 수 있었다. 이럴 경우에 영화는 환자가 되고 정신분석학은 치료자가 된다. 그러나 법의 파트너가 된 영화는 정신분석학적 치료의 대상으로부터 치료의 주체로 변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억압의 가장 중요한 기제인 법이 성찰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매체가 됨으로써 영화는 그 자체로 관객에게 ‘무의식의 거울’, 바꿔 말해 광학적 무의식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일방적으로 정신분석학의 설명적 방편이 되거나 비판적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정신분석학적 비평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또한 바로 그런 비평의 과정 속에서 법은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인간정신의 건강함을 돌보는 제도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의 형성과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의 감상은 궁극에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영화, 법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함께 하는 작업에 적합한 영화가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물론 할리우드 등의 외국 영화들에서도 좋은 소재를 고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법이 세계화될 전망을 갖는 시대에, 그런 작업은 한국인이 만든 한국 영화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10여년간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들과 문제성 있는 작품들 15편을,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발전을 주도해 온 CJ 엔터테인먼트의 라이브러리에서 골랐다. 이 15편의 영화들은 CJ 엔터테인먼트가 제작, 투자 또는 배급 중 어느 하나 이상을 담당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 대한 법정신분석학적 작업을 마쳐갈 즈음에 우리는 한국영화가 얼마나 훌륭하고 값진 예술품들인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문화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수년간 영화 산업과 미디어 산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신 CJ그룹 이재현 회장님, 한국 엔터테인먼트와 영화 그리고 미디어 산업의 세계화를 앞장서 주도하시는 CJ그룹 이미경 부회장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 책의 작업을 위한 한 과정으로 나는 2009년 2학기 고솷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와 정신분석학, 그리고 법』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원생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비판과 토론도 같이 했다. 그 세미나에 참여한 원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이 책이 전개하는 CJ 영화들에 대한 법정신분석학적 비평의 주된 내용은 내가 세미나 시간 중에 강의한 것들을 담고 있다. 나에게서 지난 4년반 동안 기초법학과 법정신분석학을 공부한 민윤영 양이 그 강의내용을 멋진 텍스트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민윤영 양은 정신분석학의 핵심문헌들을 소화하여 나의 비평이 특히 프로이트(Freud), 융(Jung), 라깡(Lacan) 그리고 데리다(Derrida)의 사상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어떤 부분은 본인의 비평을 직접 보완해 넣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초고를 내가 다시 읽으면서 다듬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나와 민윤영 양의 공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미래의 본격적인 법정신분석학 작업은 민윤영 양의 전문영역으로 예정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단지 교양서나 대중적인 글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를 다룬다고 해서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매우 학술적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실용적이며, 가독성도 매우 높다. 그래서 일반인도 이 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아무쪼록 법학도와 법률가는 물론이고,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정신의 건강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이 책이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머리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