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6월 21일 밤 1시경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변장한 뒤 튈르리 궁을 몰래 빠져나가 뤽상부르(룩셈부르크) 쪽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가, 결국 밤 11시에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바렌에서 붙잡혔다. 날이 밝자 튈르리 궁이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왕은 간밤에 어디로 사라졌을까? 세월호가 침몰할 때 대통령이 일곱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루이 16세의 실종사건에 당황하는 궁전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들은 국회의원들, 파리 시민들의 놀라는 표정이 우리의 모습과 겹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304명의 귀중한 목숨을 구하지 못한 대통령의 책임이 226년 전 감시의 눈을 피해 도주한 루이 16세의 책임보다 훨씬 크다. 정보통신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대참사를 대통령이 일곱 시간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국민은 그의 국정수행 능력을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8쪽)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은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그동안 가슴 졸이며 최종 선고를 기다리던 국민이 마침내 승리했다. 국민은 평화적인 ‘촛불혁명’으로 나라의 주인임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갈 길은 멀다. 4?19혁명의 성과를 박정희 군사정권에 빼앗긴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이제 겨우 놓은 ‘제2의 혁명’의 역사적 머릿돌 위에 반듯한 헌정질서를 확립할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기에 언제나 선의의 감시와 간섭을 해야 한다. 왕이 혁명으로 잃은 힘을 되찾으려고 도주하는 과정을 다룬 이 책을 출판하기 직전에 우리는 ‘제2의 민주혁명’을 평화적으로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차다. (13쪽)
분명한 것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덕을 제일 많이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확립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수구세력은 언제나 ‘자유’롭지만, 진보세력은 언제나 ‘자유’ 때문에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아무튼 왕의 고모들의 여행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에서 우리는 파리 코뮌과 그에 동조하는 지방정부가 왕보다 국회의 권위를 더욱 존중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왕당파가 계속 반혁명의 기회를 엿보았고, 동부의 국경지대에서는 부이예 장군의 영향을 받는 군대가 있었다 할지라도, 오스트리아 군대의 이동에 민감한 지방민들은 더욱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다. (132쪽)
미라보가 제시한 방법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와 성병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된 편견을 보여주긴 해도, 당시의 사회학적?의학적 관심을 반영했다. 몸을 깨끗하게 간수하면 병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은 특히 남녀관계에서 중요했다. 세척은 오늘날에도 강조할 수 있는 내용이다. 또 스펀지를 ‘페서리’로 활용하는 방법은 피임과 성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미라보는 심지어 건강한 남자가 성병에 걸린 여성과 관계할 때에도 스펀지를 넣으라고 권했다. 아직 안전한 콘돔이 없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미라보도 이런 글을 성교육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 시대에 나온 ‘포르노그래피’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구체제의 검열제도가 날마다 쏟아지는 출판물을 일일이 검토하고 ‘나쁜 책’(업계에서는 ‘철학책’이라고 했다)을 제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할지라도, 혁명 전까지 필화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많았다. 예를 들어 극작가 보마르셰는 생라자르 감옥에 갇혔던 것이다. 검열제도의 3단계(원고 검토, 인쇄 중, 인쇄 출판 후) 가운데 경찰은 두 번째 단계부터 개입했다. (164쪽)
“주권자인 국민은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시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폭군은 없고 법만 있을 뿐이며, 특권을 가진 기관들도 없고 공무원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왕은 제1공무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입니다.”
몽모랭이 대변하듯이, 왕이 생각하는 프랑스 혁명은 혁명세력이 생각하는 것과 원칙적으로 같았다. 그러나 과연 왕은 진심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가 튈르리 궁에서 벗어나 되도록 멀리 떠나려고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지레짐작으로 왕의 도주를 경계했겠지만, 왕과 왕비는 측근들에게 도주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도 실제로는 혁명의 적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몽모랭의 손을 빌려 혁명의 적들을 규정하고 규탄했다. (213쪽)
당시에는 지방정부와 민간인의 정치 클럽이 눈을 부릅뜨고 여행자들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게다가 실제로 병력을 움직이는 핑계가 그럴듯하지 못했다. ‘금고(또는 보물tresor)’를 수송하는 작전이라고 핑계를 댔는데, 어떤 사람들은 왕비가 오라비를 위해 돈을 빼돌리려는 수작이라고 헐뜯기도 했다. 그러므로 부이예 장군이 병력을 배치하는 일도 왕 일가가 튈르리 궁을 빠져나오는 일만큼 위험했다. 그리고 몽메디로 가는 길에 들를 바렌에는 역참이 없었기 때문에 지친 말을 바꾸기 위해 왕의 마차에 맬 말 여섯 필, 2륜마차에 맬 말 두 필, 그리고 필요한 경우 왕이 탈 말을 포함해서 승마용 말 몇 필을 따로 준비해두어야 했다. 작은 마을 바렌에서 말 몇 필을 매어두고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도 어두울 때 도착할 왕 일가가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해두어야 했다. 이렇듯 왕의 앞길은 위험의 연속이었다. (236쪽)
무스티에는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방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는 억지로 국민방위군들을 헤치고 나가긴 했지만 왕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소스의 집 2층으로 올라가 왕에게 말을 구할 수 없다고 사뢨다. 왕은 어떻게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거기까지 자신을 따라간 충성스러운 전령 세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렌 주민들과 국민방위군이 그들을 죽일 듯이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왕의 모험은 해가 뜨면서 끝나가고 있었다. 코르들리에 수도원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뢰리그가 경기병 60명을 데리고 제때에 나타나고, 다리 건너에 있던 레주쿠르와 슈발리에 드 부이예(샤를)가 어떻게든 다리의 장애물을 치우고 왔다 해도 주민들과 국민방위군을 모두 죽이기 전에는 왕 일가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아침 7시가 넘어 마차에 올라타면서 마지막으로 몽메디로 가자고 명령했다. 그러나 마차는 오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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