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 버려진 풀꽃과 같았던 고려인의 운명으로부터 떨쳐 일어나 탁월한 교육자로서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민족혼을 뿌리 깊은 나무처럼 가꾸어 가는 엄 넬리 교장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엄 교장은 강원도 영월 출신인 증조할아버지가 러시아에 정착한 동포 4세다. 1860년 증조부가 가정을 거느리고 러시아 연해주로 떠나 3대에 걸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을 무렵인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18만 고려인이 화물 열차에 실려 머나먼 중앙아시아 살벌한 갈대밭에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부모님한테서 노래처럼 들으며 자랐다는 그녀다.
참혹한 시대에 장차 공부를 해서 출세하려는 의욕을 키운 엄 넬리는 16세에 부모님을 따라 모스크바에 들어와 중학교, 사범대학을 마치고 교단에 올랐다. 소수 민족으로서 남보다 10배의 노력을 들여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한 그녀는 혼신의 열정을 실무 제고에 쏟아 부어 일취월장의 실적을 올렸다. 30대 초반에 전국 10명 우수 교사 중의 최연소 일원으로서 레닌 훈장을 수여받기까지 그녀가 흘린 땀과 지새운 밤은 얼마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중고교 생물 교사로 7년간 일했다. 교사 생활을 하며 5년 뒤엔 교육학 석사 학위를 땄다. 32세 때는 교감으로, 35세엔 벌써 교장 자리에 앉았다.
교육학 박사 출신으로 1977년에 레닌 상을 받을 정도로 러시아 정부에서 최고의 엘리트로 대접받던 그녀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1991년 러시아 교육자들과 함께 서울을 첫 방문하면서부터다. 소수 민족에 대한 교육이 금지된 상황에서 성장했기에 오십 세가 넘기까지 우리말과 글을 한 마디도 몰랐던 그녀는 심한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모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녀는 지난 91년 모스크바 시 교육청, 고려인협회 및 한국대사관 등의 협력을 얻어 모스크바 유일의 공립 1086 한민족 학교를 설립, 러시아에서 한인으로는 유일하게 교장직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게 됐다.
처음 1086 한민족 학교를 설립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다. 러시아는 민족 차별이 많기 때문에 러시아 인들의 거친 항의에 부딪쳤다. 러시아 아이들도 공부할 시설이 모자란 데 민족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제는 러시아에서 한민족의 얼을 잇고 전파하는 요람이 됐을 뿐 아니라, 개교 5년 만에 졸업생 거의 전원이 대학에 진학하는 모스크바 제일의 명문학교로 자리 잡았다.
수업 종소리를 ‘아리랑’으로 하는 것이 상징하듯 러시아 내 유일한 한민족 학교를 설립한 엄 교장은 우수 교사들에게 자신의 월급으로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탁월한 학교 경영 능력을 발휘해 1086 한민족 학교를 모스크바 3,500개 학교 중에 손꼽히는 명문학교로 만들어 유네스코 최우수 민족학교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입학 경쟁률도 10대 1을 훌쩍 넘으며, 초중고 교과 과정을 한국어와 러시아 어로 수업하고 있다. 학생의 60% 정도는 교민을 포함한 한국인들이고, 나머지 30%가 러시아인, 10% 정도가 흑인 등을 포함한 다른 민족 학생들이다.
엄 넬리 교장은 교포 4세로 자신도 처음에는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구소련 당국은 한인들이 세운 학교, 극장, 신문과 잡지 등 한국인의 혼과 정신을 이어갈 모든 것을 금지했고, 한국어 사용 금지와 모국어를 잊어야 한다는 강제 명령서까지 발급했다. 그래서 엄 교장은 나이 52세가 되어서야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설립하면서 자신이 먼저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하루에 우리말 단어 15개를 외우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피눈물 나는 한국어 독학으로 이어졌다. 1992년 곧장 한민족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과 함께 한국어를 배웠고, 한편으로는 서울 양정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하여 한국어 콘텐츠를 지원받았다. 2002년에는 자체적으로 초중고 한국어 교재 11권을 만들어 교과서로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국가연합(CIS) 전체에 산재해 있는 한민족 학교에도 교재를 보급하며 한글교육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이런 노력이 조명을 받으면서 한국 정부로부터 무궁화훈장, 국민훈장 등을, 삼성생명 공익재단으로부터 비추미 여성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지난 17년간 그녀는 민족 학교 운영에서도 러시아 교육계서 인정받는 괄목의 성과가 이어져 유네스코 우수교육자 상, 러시아 최우수 교장 상, 2007년 6월엔 러시아 교육 발전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애국훈장을 수여(러시아 전역 4명)받았다.
엄 교장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 후세들에게 모국어뿐 아니라 한국 문화를 가르쳐 한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돌, 결혼, 환갑 등의 기념 행사를 통해 한국의 전통과 예절을 가르쳐왔으며, 매년 설날, 추석, 한식 등 명절과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등 행사를 성대하게 치러 한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고 있다.
한편 엄 교장은 명절이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고려인 학생, 그리고 지난 1990년대는 러시아 경제 사정이 어려워 학교의 숙식 조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모스크바 여러 대학의 한국 유학생들을 집에 불러 음식을 대접하며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다. 이들이 이후 석사, 박사를 마치고 귀국했어도 엄 넬리 교장은 이들 마음속에 자애로운 어머니로 살아있다고 한다. 현재 국내 여러 분야에서 핵심적인 직책에 있는 양아들들이 자서전 출간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고, 출간에 따른 비용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