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전적으로 방법론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절망과 비관까지도 끌어안는 사회이론의 가능성에 대한 장기적인 모색 속에서 기획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2009년 이후 목도했던 쌍용차 노동자의 연쇄 자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국사회 자살문제가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인 동시에 사회 연대의 문제이자 곧 도덕의 문제라면, 우리 현실을 바탕으로 한 사회이론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설정은 바로 한계에 부딪혔다. 맑스와 베버, 베버와 뒤르케임, 맑스와 프로이트 등을 이론 구성의 계기로 삼았던 현대 사회이론의 경로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이론을 적절히 연결하는 루트를 찾기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그 원인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사회연구를 견인하는 메타이론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는 비단 특정 사상가의 해석에 제한된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적절한 메타이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사회연구의 관행은 적절한 사회과학의 부재나 ‘사회과학 없는 사회’의 위기로 이어져, 오늘날 사회 현실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합리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의문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상대주의의 도전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 p.10
학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모든 지식 분야는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계를 통해 통합적인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충분한 합의에 이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수준의 통합을 달성할 메타이론적 기초가 성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되는 ‘학제적’, ‘융합’, ‘통섭’ 담론은, 새로운 지식 상품에 머물거나 분과학문의 경계를 되레 강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삶의 존재론적 토대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 통합 논의는 자칫 또 다른 형태의 환원주의적 통섭의 경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문화’의 선구적 비판자였던 맑스와 뒤르케임의 비판적 자연주의가 인문사회과학의 토대를 새로이 하고 실현 가능한 지식통합의 경로를 모색하는 데 유의미한 참조점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 p.12
이 책은 총 여덟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크게 세 차원의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II장에서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국내 연구의 전개와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두 사상가를 가로지르는 공통된 해석의 구조와 방법론적 쟁점을 추출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론의 역사는 해당 사회의 발전을 보여주는 역사과정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양자의 방법론에 대한 기존 관념 및 해석 또한 사회 연구자들의 일상적인 실천과 분리될 수 없는 ‘한국 사회학’을 구성하는 일부이기에, 우선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경험적 자료다. 이는 상식적인 과학적 절차이자, 선행연구와의 토론을 과학적 발견의 중요한 계기로 삼았던 맑스와 뒤르케임의 설명적 비판에 따른 연구절차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해석된 맑스와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연구사적으로 돌아봄으로써 양자의 과학성을 평가하는 준거로 기능해왔던 실증주의 과학관의 한계가 분명해진다면, 이어지는 제III장에서는 실증주의 과학관이 부과한 이원론적 문제장을 넘어설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과 주요 개념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맑스와 뒤르케임의 방법론을 비교·분석·재구성할 수 있는 포괄적인 해석의 틀을 마련한다.
제IV장에서는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이론이 형성된 19세기 사회적·지성사적 문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칸트(I. Kant) 이후의 이원론적 이분법을 지양하며 그 골격을 구축한 맑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철학을 살펴본다. 두 사상가의 초기 저술은 이들 방법론을 해석하는 준거로 자리한 대부분의 이분법이, 맑스와 뒤르케임 자신이 넘어서고자 했던 이분법임을 드러내준다. 특히 당대 맑시즘에 대한 뒤르케임의 직접적인 리뷰인 「맑시즘과 사회학: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관념」(1897)은 맑스와 뒤르케임의 간접적인 상호 대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텍스트로 불려온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맑스와 뒤르케임의 자연주의가 평면적인 존재론이 아닌 반환원주의와 심층 실재론에 의해 일관되게 지탱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양자가 공유한 반환원주의적 층화이론과 공시발현적 힘의 유물론은―다음 장에서 살펴볼―『자본론』과 『자살론』에 적용된 과학적 실재론과 역사적 설명모델의 생산성을 새롭게 이해할 전제가 된다.
제V장과 제VI장에서는 비판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자본론』과 『자살론』을 다시 읽으며, ‘정치경제학 비판’ 과정에서 구축된 양자의 사회과학방법론이 지닌 쟁점과 함의를 살펴본다. 『자본론』과 『자살론』은 맑스와 뒤르케임의 과학방법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논쟁적인 텍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쟁의 중심이었던 까닭에, 두 저술은 그간의 논쟁을 효과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중심이기도 하다. 아울러 두 저술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및 『사회분업론』 그리고 기타 관련된 저술은 기존의 분절적 독해 방식을 지양하기 위한 텍스트로서 참조된다. 두 사상가의 사회적 존재론→설명적 방법론→설명적 비판이론(실천적 사회이론)으로 이어지는 전개 과정은 곧 사회와 사람, 이론과 경험, 이론과 역사, 이론과 실천, 사실과 가치, 과학과 도덕(정치) 같은 이분법이 해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VII장에서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의제화된 ‘맑스와 뒤르케임의 딜레마’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독해’의 발견에 입각해 ‘기존의 독해’가 일으키는 혼란의 원천을 재검토하고, 양자의 설명적 비판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새롭게 생성된 자연주의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논의한다. 이 책의 중심 개념인 ‘설명적 비판’ 이론은, 사회세계는 사회적 객체와 함께 사회적 객체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사회세계를 탐구해서 설명하는 연구는 그 자체로 ‘비판’을 내포하고 가치와 행위에 대한 판단을 수반한다는 주장이다. ‘설명적 비판’은 비판 없는 설명과 설명 없는 비판을 지양하고 사회과학적 설명과 사회이론적 비판을 통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실진술과 가치진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논리적 간격을 설정하는 ‘흄의 법칙’은 기각되며, 가치판단은 설명적 사회과학이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정당하게 자리매김 된다. 이것이 사회과학에 적용된 윤리적 자연주의의 가능성이다.
윤리적 자연주의가 추구하는 설명적 비판이라는 이상은 허위의 믿음을 발생시키는 방식만이 아니라, 특정 사회구조들이 야기하는 고통과 결핍에 대한 해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이 맑스와 뒤르케임의 상보적 결합이 열어놓는 가능성의 핵심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주장이다. 양자 모두 사실적 평가와 도덕적 평가를 통합하고자 했던 이론가로서 반자연주의 윤리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할 수 있지만, 뒤르케임의 도덕과학은 맑스의 자연주의를 한층 더 정교화하는 동시에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된 조건이 요청하는 심층설명적(deepexplanatory) 비판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제VII장의 말미에서 보론 형식으로 도입한 ‘집없음(homelessness)’과 ‘세월호 트라우마’에 대한 실재론적 사례연구는 이 가능성을 예시하기 위한 시도다.
마지막으로 제VIII장에서는 이 책의 발견이 오늘의 사회과학에 던지는 현재적 함의와 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한다. 이 책이 조금이나마 새로운 주장을 담고 있다면, 기존 이론들이 맑스와 뒤르케임의 차이를 보는 지점에서 이 책은 양자의 공통성을 발견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비판적 실재론의 지원 속에서 뒤르케임에 대한 바스카의 실증주의적 독해를 바로잡고, 맑스와 뒤르케임을 동일한 자연주의 사회과학의 지평에 세우는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수정된 지형도를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은 궁극적으로 ‘두 문화’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방법론적 대립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학문 통합의 노력을 더 정교하게 지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 p.24~28
그렇기에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사회적 고통은 지금의 경험적 세계를 넘어, ‘너머의 삶’에 다가설 통합된 인문사회과학의 개입과 상상력을 그 어느 때보다 요청한다고 하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맑스와 뒤르케임, 바스카의 비판적 자연주의는 현대사회의 사회적 고통이 갈급하고 있는 통합적 관점을 확고히 뒷받침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 자유주의 세계관이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부활해 전사회적인 양극화가 악화 일로에 있는 현시점에서, 두 사상가의 사회이론은 ‘대안은 없다(TINA)’는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해체사회’의 구조적 내면을 드러내고 대항경향을 생성하는 작업을 협력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또한 두 이론가가 공유한 관계적 사회학과 반환원주의적 층화이론은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은폐하려는 모든 관행과 시도에 대항하면서, 여전히 지속되는 동시에 변형된 형태로 재생산되는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복합적 병리를 진단하고 처방하기 위한 집합적 노력에―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회적 죽음의 사인(死因)을 밝히는 작업에―생산적으로 접목될 수 있을 것이다.
--- p.531~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