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돌파하는 강력한 리더십이라는 서사는 전형적인 ‘우파의 신화’이다. 하지만 이 신화는 ‘위기’를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즉 위기의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 이 ‘역사 없는 신화’야말로 한국 보수 집단이 만들어낸 유일한 상징체계일지도 모른다. 친일, 쿠데타, 독재, 부패 등의 역사를 내치지 못한 채 냉전과 이권만을 지켜온 보수의 신화는 그래서 텅 비어 있다. 박근혜라는 인물은 ‘지킬’ 역사가 없는 한국 보수의 공허함을 지시하는 기표, 혹은 보수라는 상징체계 아래에 있는 “실재의 사막”이다.
---「박근혜, 혹은 실재의 사막」중에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에서 세월호로 이어지는 거대한 재난은 비정규직 대우와 손쉬운 해고에 분노하다 자살하는 노동자들, 합리성과 효율성에 최적화된 인간을 생산하기 위한 살인적 교육 속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청소년들, 만성적인 스트레스, 우울증과 폭력에 시달리는 한국인 전체가 겪고 있는 일상적 재난의 확장판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삶 자체를 재난화하는 체제이며,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묘사하듯 재난 속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미덕으로 만들어내는 변태적인 체제다. 이 변태적인 체제를 합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는 이 재난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안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적은 누구인가? 인간을 일회용으로 여기는 자본과 그 마름인 국가다.
---「적은 누구인가」중에서
우리 시대는 ‘재난의 시대’다. 원자력발전소 폭발, 테러리즘, 금융 위기 등에는 국경이 없다. 재난은 상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애도’라는 정동(情動)을 동반한다. 애도의 행위가 죽음을 만들어낸 거대한 질서를 인식할 때, 애도는 외적이고 사회적 차원의 투쟁으로 격상된다. 애도는 개인의 슬픔을 지칭하지만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다. 재난으로 인한 국민적 애도는 슬픔을 관통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기회를 열어젖히는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우리 시대는 재난도 만들어내지만 정동도 만들어낸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극도의 조증과 극도의 울증 사이를 번갈아가며 인간을 소모시킨다. 두 극단 모두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재난, 세월호, 애도」중에서
인간의 공간이 자본의 공간으로 바뀌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최신식으로 변해가는 자본의 공간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에 대한 스마트한 관계 맺기로 새롭게 구성된다. 자본이 구획해놓은 동선을 따르며 상품 스펙터클의 대상이 되고, 자본이 마케팅하는 ‘이벤트’의 관객이 되며, 상품 관계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오늘날의 대학이 대표적이다. 캠퍼스가 깔끔해지고 고층화되는 현상과 인문-사회-예술이 대학에서 주변화되는 현상은 동일한 것의 양면이다. 자본이 대학을 지배할 때 인간의 학문은 쫓겨나고, 고급 아파트가 서민의 골목을 집어삼킬 때 우리 삶의 어떤 모습들도 함께 사라진다. 모든 것의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모든 것의 젠트리피케이션」중에서
‘학생부’가 중고등학생의 삶을 주조한다면, 자소서는 대학생의 삶을 주조하는 ‘주체화 장치’다. 자본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청년의 삶을 생산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렇게 생산되는 ‘자기’란 ‘스스로를 인적자본으로 바라보고 투자 대비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자기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인간’, 곧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그의 삶은 완벽한 자유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자본에 구속된 인간으로 스스로를 관리한다. 오늘날 정치는 국회나 청와대에 있다기보다 기업의 자소서가 만들어내는 청년들의 삶 속에 있다. ‘삶 정치’란 이런 것이다.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청년에게 있다? 아니다. 그것은 청년의 삶을 생산해내는 자본에게 있다.
---「자소서는 어떻게 ‘자소설’이 되는가」중에서
20-30대 여성들은 거의 모두가 크든 작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경험한다. ‘여성혐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혐오를 ‘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다. 유대인 혐오, 동성애자 혐오, 전라도 혐오, 장애인 혐오는 있어도 그 반대는 없다. 강자인 남성에 의한 여성혐오는 성추행부터 살인까지, 취업차별에서부터 유리천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의 폭력을 부른다. 그에 대한 여성의 반발은 오직 ‘말’의 영역에만 있다. 남성지배사회에서는 ‘남성혐오’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성별이 일상적 차별과 폭력에서부터 죽음에까지 ‘쉽게’ 연결되는 성차별 사회. 오늘 한국 여성들의 분노는 이 점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묻지마 살인’이 아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