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런 생각 따위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노란색 하이힐을 신고 빨간 미니스커트에 청록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안개가 자욱한 날에도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띌 듯한 모습이었다. 래브라도 안내견의 하네스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쓰고 있는 커다란 선글라스는 남들 눈에 띄는 게 두려운 유명 스타가 걸친 액세서리로 보일 터였다. 하나로 단정히 묶은 숱이 무성한 붉은빛 금발, 거의 비치다시피 하는 시스루 블라우스 아래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풍성한 가슴, 립스틱이 반짝이는 입술 위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그녀는 동정보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각장애인이었다. --- p.7
내 인생은 아주 거칠게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나를 이민에서 생산된 결과물로 취급했지만, 사실 나는 무엇보다 문학적인 프로젝트였다. 다마스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의 경비원이 쓰레기통들을 비우다가 그중 하나에서 발견했을 때, 난 태어난 지 몇 시간 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도로 청소부가 지나간 후 누군가 나를 놓고 간 것이 분명했다. 문화부 담당관의 아내였던 엘리안 드 프레쥬는 나를 외교행낭으로 시리아에서 데리고 나올 정도로 나를 입양하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썼다. 나의 태생을 존중했던 그녀는 나를 지발이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지발라’는 쓰레기통이다. 그녀는 상상력으로 내 출생의 나머지 여백을 채웠다. 아내에게 간통죄라는 죄명을 씌워 일방적으로 이혼한 베두인족 족장을 나의 아버지로 만들었고, 부족에서 쫓겨난 그의 아내는 나를 프랑스 공화국에 생활 쓰레기로 위탁하면서 아들의 미래를 아주 훌륭한 운명으로 정해준 셈이 됐다. 엘리안 드 프레쥬가 쓴 소설 『쓰레기통의 아이, 지발』은 내가 열세 살 되던 해에 페미나상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나를 입양한 양모의 관대함과 친모의 희생을 바탕으로 시앙스포를 졸업한 베두인족 주인공인 나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소설 속 지발은 주머니에 졸업장을 챙겨 다마스로 돌아가서 아사드 대통령을 쓰러뜨리고, 이슬람 형제단에게 득 되는 행동 없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다. 그 후 아이 세 명을 남기고 438쪽에서 영웅으로 죽는데, 어느 날 세 아이 중 딸내미 한 명이 파리 주재 시리아 대사가 되어 필생의 작품을 완성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 p.14~15
악몽은 다음 날 시작되었다. 상황에 적응하고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시력에 대한 분석과 시험을 하고, 얼마나 시력이 향상되었는지를 살펴본 후, 피욜 교수님은 내게 퇴원해도 좋다고 알려줬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을 때면 눈 안에서 작은 모래알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퇴원했다. 병원 주차장에서는 아빠가 쥘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보고 심히 당황스러운 행동을 했다. 개가 물어오는 공을 나에게 던진 것이다. 나는 펄쩍 뛰어 공을 잡았다. 아빠가 달려와 나를 꼭 껴안았다. 쥘은 순간 껑충껑충 뛰어오르던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입가에 굳은 미소를 띠고 두 눈으로 쥘을 응시했다. 그리고 쥘의 앞에 몸을 구부려 무릎을 꿇었다. “넌 정말 잘생겼구나, 쥘, 내 강아지, 정말 잘생겼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5만 배는 더 잘생겼어.” 쥘이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숨도 멈춘 채 쥘이 내 품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두 손을 크게 벌렸다. 한 10초 정도 몸을 떨더니 쥘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를 바짝 긴장시키고 내 주위를 도는 쥘이 보였다. 코를 킁킁거려 내 냄새를 맡고는 나를 핥으려 혀를 내밀었다가 막상 닿기 전에 다시 혀를 집어넣었다. 모순을 깨달은 쥘에게 복잡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와 눈빛과 몸짓을 스쳤고, 곧이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 알리스가 혼자 걸어가 자신의 도움 없이 문을 열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공을 잡으며,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것은 더 이상 알리스가 아니었다. --- p.37~39
몇 년 동안 나는 내 작품 세계를 아주 잘 이끌어왔다. 테레빈유 냄새가 좋았고, 손가락 아래 끈적이는 물감과 캔버스의 까끌까끌한 촉감도 좋았으며 파스텔화의 광택, 팔레트 위에 펼쳐진 다양한 색조들이 좋았다. 프레드가 나를 위해 기획한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표현이 좋았다.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며 솔직하거나 혹은 진부한 감정의 흐름들. 난 내 그림이 그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말했다. 그들은 카탈로그에 적힌 내용을 그들의 방식으로 반복할 뿐이었다. ‘당신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네가 말한 대로야.’ ‘이 봉인된 수족관, 그 안에서는 유령들이 손잡이 없는 창문 뒤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나는 마그리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내놓은 건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년 발산된,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참 싫었다. 나는 ‘시력을 되찾은 목소리’라는 모토로 후원받고 RTL방송국도 지원해주기로 결정돼 프레드도 좋아하며 반겼던 10월의 전시회를 취소해버렸다. “알리스, 암흑기는 갖다버리라니까.” 프레드가 다시 되풀이했다. “새롭게 보이는 이미지를 그려봐. 큰 성공을 거둘 거야!” 큰 성공이라. 그렇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아티스트로 만들려 애쓰는 사람에게 나에게 예술은 그저 언어의 대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고백하겠는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재발견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을 직접 관찰할 수 있으니까. 나는 살고 싶었다. 그것뿐이다. 보상하기를 멈추고, 재창조하기를 그만두고,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싶었다 ?최악인 건 그것들을 다 내가 도모했다는 점이다. 내 그림에는 실명한 초기에 극복했다고 믿었던 소리 없는 절망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돼 있었고, 소리 없는 절망은 견디는 방법을 찾아낸 지금 내 눈앞에서 힘을 되찾았다. --- p.84~85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빠끔히 열렸다. 쥘이 이마로 문을 밀고는 내가 지나가게끔 잡고 있었다. 환심을 사려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훈련된 행동인 것 같다. 녀석은 홀의 서늘한 어둠 속으로 앞장서서 들어가, 엘리베이터의 쇠창살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버튼은 최신식 터치 시스템이었고, 녀석의 발톱은 버튼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나는 쥘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녀석은 엉금엉금 기어 다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십중팔구 기분이 상한 것이다. 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녀석은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p.106~107
“평소처럼 해줄까” 아이스크림을 파는 점원이 쥘에게 물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콘을 하나 꺼내 초콜릿, 캐러멜, 딸기 세 가지 아이스크림을 공 모양으로 동그랗게 눌러 올린 다음, 녀석의 주둥이에 물려 주었다. 계산대에 기대서 있던 쥘은 아이스크림을 흘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고는 미끄러지듯 엎드린 다음,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아이스크림을 권했다. 짭짜름한 맛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녀석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쥘이 알리스와 같이 행했던 휴가 의식을 나와 함께 반복하고 있는 것이리라 추측했다. 이빨 자국만 조금 났을 뿐 거의 상하지 않은 비스킷 콘을 녀석의 주둥이에서 빼내, 예의 바르게 부러 큰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동안, 점원은 똑같은 조합의 아이스크림을 쥘에게도 만들어 주었다. 휴식을 취하러 향한 벤치에서 쥘의 정교한 테크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은 옆으로 누워 두 발을 십자로 교차시켜 그 사이에 콘의 끝을 꽂고 가슴에 대고 눌러 고정한 다음, 아이스크림 공을 혀끝으로 공략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나머지 아이스크림을 삼키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입술을 바쁘게 핥으며 쥘은 내가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목줄 손잡이를 다시 내게 건넸고 우리는 널빤지 길 위를 계속해서 산책했다. 널빤지 길은 엽서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수평선 풍경을 가로지으며, 르 아브르의 정유 공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 p.142~143
매일 아침, 플랭에르 협회의 미니버스가 도착하는 순간을 관찰했다. 미니버스는 해변에서 한나절을 보낼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들을 싣고 왔다. 쥘은 장애인들에게 튜브나 캡 모자, 모래용 삽 따위를 앞장서서 가져다주었다. 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활약했지만 그들에게는 공포와 울음, 스트레스, 히스테리만 일으킬 뿐이었다. 장애인 일행이 발길질을 하며 쥘을 쫓아냈다. 해변에서 쫓겨난 쥘은 이번엔 고통받는 영혼을 찾아보려 마을로 달려갔다. 노숙자들에게 다가가기도 했고, 역 앞 마약 중독자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마약 중독자들은 쥘을 잡아다 팔기 위해 포획을 시도했다. 장애인과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비굴하게 졸졸 쫓아간 쥘은, 빨간불에 멈춘 차 앞에 불쑥 나타나 허락 없이 앞 유리창을 닦는 사람들처럼 위협적이고 무례하게 보일 뿐이었다. 결국 녀석은 꼬리를 낮추고 코를 경계태세로 한 채 재빠르게 내빼야 했다. 이 아이를 어디에 가두거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마음대로 부리는 일은 이제 불가능했다. 하네스 줄을 잡는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하네스라는 작업복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쥘의 탐색을 정당화하는 셈이었다. 어느 날 아침, 22호실의 발코니에 서 있던 나는 쥘이 저먼 셰퍼드가 돌보는 시각장애인 주인을 빼앗으려고 그 개를 공격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그저 질투 때문만이 아니라, 직업의식 때문이었다. 저먼셰퍼드가 주인을 인도해 연줄 아래로 지나가면서, 주인의 목이 2초 후 쯤 연줄에 비스듬히 걸리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일로 쥘을 꾸짖으면 나는 녀석이 받은 훈련에 반하게 되고 만다. 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며 지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발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쥘은 지발을 마치 살아 있는 설득 수단처럼 생각했다. 우리의 행복은 쥘의 노력으로 맺은 열매이고, 본능에 따라 행동해 얻은 성공의 증거였다. 가난한 이웃을 솔선수범해 방문하는 프리랜서 보조자이자 독립적 노동자인 내 개는 이제 통제가 불가능했다. 방랑하는 자원봉사자였고 해변에서 제일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 p.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