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은 백만 개가 모여도 1이 되지 못한다)
당연히, 사회는 악명 높은 주관주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사회 자체가 개성을 잃은 인간 존재들로 구성되는 한, 그 사회는 무모한 개인주의자들에게 완전히 휘둘리게 되어 있다. … 불행히도, 0은 백만 개가 모여도 1이 되지 못한다. 종국적으로 모든 것은 개인의 자질에 달려 있는데도 대단히 근시안적인 우리 시대는 오직 숫자의 크기와 대중 조직의 차원에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 발견되지 않은 자기
(직선적인 삶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길가메시 신화를 보면, ‘완벽한’ 인간은 3분의 2는 신성하고 3분의 1은 인간인 그런 존재로 여겨진다. 완벽한 인간은 비애와 기쁨을 느끼는 인간이고, 두 가지 운동을, 말하자면 높이 올라갔다가 깊이 떨어지는 운동을 하는 존재이다.
완벽한 삶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외향에서 내향으로, 내향에서 외향으로 크게 이동하는 그런 삶이다.
상반된 것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삶은 그냥 직선의 삶일 뿐이며, 그런 삶은 마치 호흡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삶을 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장 확장과 심장 수축처럼 리듬을 타며 사는 사람은 온전한 삶을 살 것이고, 따라서 완전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 꿈의 분석
(사람이 많은 곳에선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혹시 국가가 어떤 악취라도 풍긴다면, 그건 구성원 개인들의 냄새이다. 인간들의 냄새는 기본적으로 썩 좋지 않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야생 동물이 사람을 피하는 것은 사람의 냄새가 사자의 냄새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양인들은 흑인들의 냄새에 강렬한 인상을 받지만, 많은 사람이 모일 경우에는 흑인들의 냄새나 유럽인들의 냄새나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대목에서, 엄청난 숫자의 개인들의 냄새를 통해서 군중 심리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심리에 따라 냄새를 맡는다. 냄새를 맡는 것은 반(半)정신적인 기능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나지도 않는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우리 안의 미신)
정상적인 사람 50명을 모아놓고 미신을 믿는지 물어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절대로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 13호에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서양에서는 숫자 13에 대한 공포를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Triskaidekaphobia)라고 부른다).
그들은 악마나 귀신, 유령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서재의 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그런 그들도 화들짝 놀랄 것이다. 말과 달리, 그들도 귀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날 책에나 나올 그런 생각과 공상을 떠올린다. - 꿈의 분석
(신에게도 다른 존재가 필요했다)
동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신은 혼자였다. 그런데도 전혀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신임에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기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 신이 자기 자신을 비춰볼 존재들을 창조한 것이다. 바깥에서 자신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신 자신을 아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얼굴이 어떤지, 몸 단장이 어떤지를 보려면 거울이 있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거울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막에서 당신을 비춰줄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외로이 산다면,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진리는 상대적이다)
하나의 진리는 절대로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에만 진리일 수 있다.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진리라는 것도 거짓말일 뿐이다.
명확한 원리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철학과 종교도 심리학과 아주 비슷하다. 어떤 원리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발달의 이 단계에서 진리인 것이 발달의 다른 단계에서는 진리와 꽤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러기에 진리는 언제나 발달의 문제이고 시간의 문제이다.
어느 단계에서 최선의 진리인 것도 아마 다른 단계에선 최악의 독이 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자연 자체가 철저히 귀족적이고 대단히 난해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당신의 감정은 당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감정적인 말을 뱉을 때마다, 그 말이 바로 당신 자신에 대한 말일 확률이 아주 높다. 바꿔 말하면, 당신의 감정 때문에 투사가 일어나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뜻이다.
당신은 언제나 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곳에서 감정을 품게 된다. 적응이 제대로 되었다면, 전혀 아무런 감정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은 당신이 자신의 과제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겉으로 드러내는 본능의 폭발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모를 때, 당신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감정은 어떤 것이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고 예외적인 상태이다. 자아가 일시적으로 감정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사람은 이성을 잃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예외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언제나 동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까지도 두려워한다.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