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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까라뜨 2

마스까라뜨 2

서린 저 | 눈과마음 | 2003년 08월 0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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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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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3년 08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329쪽 | 460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57511022
ISBN10 89575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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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린
1976년 8월 생. 2002년 10월 『퓨리어스 게임(Furious Game)』출간. 2001년 여름부터 온라인 활동 시작. 완결작으로 『외면』『팜므 파탈(Femme Fatale)』『마스까라트』가 있으며 현재 온라인에 『떼조로(Tesoro)』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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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야멸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운전사를 애처롭게 쳐다봤지만 짙은 선글라스 속의 눈빛이 어떤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몇 분이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를 쳐다봤지만 남자의 입매가 잔인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한 달 전만 해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금, 이 상황은 분명히 현실이다. 순간 거칠게 운전석을 박차고 나간 남자가 차를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어젖히자 눈물이 찔끔 솟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그녀를 덮쳤다.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려!”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몇 대쯤 후려갈기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부아가 치밀어도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쨌건 자신은 오늘 밤 그들의 더없이 중요한 ‘상품’이니까. 그러니 저 목석같은 인간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녀에게 감히 손찌검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남자의 손을 보며 사지(死地)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저 남자를 더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욕구도 잠시 후 푸시시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이 순간 우습지도 않은 복수가 다 뭐란 말인가.
오늘 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일을 두 가지나 해내야 하는데. 저 남자의 말 그대로 죽고 싶지 않다면.
순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러워 눈물이 차 올랐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여우털 코트로 몸을 감쌌다. 코끝까지 모피로 감싸자 매서운 바람도 그렇게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황홀한 모피에 기절이라도 할 듯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없이 비참하기만 하다.
여자가 느릿하게 차 밖으로 내리는 것을 이를 악물고 노려보던 남자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 핸드백을 건넸다. 마치 폭탄이나 된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백을 받은 여자는 다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끝나고 나면 전화해. 두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두 시간이면 충분하겠냐고? 섹스를 하고, 그리고 함께 섹스를 한 그 남자를 죽이는 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도대체 자신이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예.”
남자는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뾰족한 하이힐을 신은 발끝까지 쭉 훑어봤다. 남자의 시선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이 순간이 끔찍하기만 하다.
자신을 태우고 왔던 커다란 자동차가 연기를 뿜으며 왔던 길로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은 차가 완전히 사라져도 그곳을 떠날 줄 몰랐다. 한참 동안이나 눈 쌓인 길을 쳐다보던 여자는 몸을 스쳐가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값비싸고 아름다운 모피 덕분에 그 안에는 옷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천 조각을 걸치고 있지만 춥지는 않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신발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어보는 아슬아슬한 하이힐. 차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자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발이 시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젠장!”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욕설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태도가 숙녀답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빌어먹을 숙녀라니. 지금 자신과 제일 거리가 먼 단어가 바로 숙녀 아닌가.
남자가 건네준 핸드백을 억세게 움켜쥐며 그녀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00미터 정도만 걸어가면 다차가 나온다는 것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목표 장소를 찾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 이후다. 오늘 밤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임무를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자신이 없긴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 일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만약 오늘 일을 실패한다면, 그녀 앞에 펼쳐지는 미래는 딱 두 가지밖에 없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매음굴로 팔려가거나.
끔찍한 상상에 머리를 저으며 여자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후의 일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 아니,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어야만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오늘 자신이 해치워야 할 남자가 범죄 집단의 두목이라는 것.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한평생 좋은 일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런 인간이라면 좀 일찍 죽어도 이 세상에서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도달한 합리화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의 얼굴은 다시 일그러졌다. 며칠 전 받았던 남자의 사진이 기억 났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던 남자. 그는 아무리 많아 봐야 30대 초반밖에는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 카메라를 의식했더라도 그것과 다른 어떤 표정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쩌면 잘생겼다고 평해 줄 수도 있을 법한 외모였지만 그런 마음을 막은 건 눈이었다.
차가운 은색 눈동자.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등줄기를 떨리게 만들던 차가운 은회색 눈동자.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두렵게 만드는 동시에 묘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과연 이 남자를 속일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이어지던 묘한 기분.
그래, 이해할 수가 없는 감정에 그녀는 사진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얼음처럼 빛나던 그 눈동자가 왜 슬퍼 보였을까? 어째서 온갖 악행으로 더러워졌다는 남자의 눈이 그렇게 투명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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