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근무를 하면서 지켜본 학교는 내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학교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획일적인지, 내 나름대로 아이들을 지도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교육청 장학사들이라는 사람들은 평교사 1, 2년 하다가 해방을 맞아 일본 놈들이 모두 쫓겨 가는 바람에 30도 안 된 젊은 나이에 교장으로 벼락 승진했다가 장학사가 된 사람이 태반이었다. 교사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놈들의 식민지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여 권위의식만 머리에 꽉 차 있었다. 그래서 교사는 아이들 수업보다는 교육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공문과 엉터리 통계만 잘 내면 되었다.
‘공문을 작성해 보고하라’는 상부지시만 내려오면 교감과 교무주임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설쳐대는지, 수업시간에도 무조건 자습을 시키고 교육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불필요한 공문을 작성해야 했다. “교사가 학생 수업이 제일 중요하지 무슨 놈의 공문 처리가 이렇게 중요하냐? 공문 처리는 수업하고 나중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항의 비슷하게 말하면, “신임 교사가 왜 학교 방침대로 하지 않고 말이 그리 많으냐?”는 것이었다.
불만을 토로하고 항의를 하거나 토론 등을 요구하면, 그런 선생들은 아무리 교사다워도 영영 진급을 할 수 없는 풍토였다. 아이들을 위해 교사답게 아무리 온 정열을 쏟고 올바른 행동을 하더라도 교장이나 교감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고 비교육적인 것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면 그 교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육계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pp.27-28
운동장 한구석에서 조용히 몸을 숨기고 교실로 들어가 시험지를 받아보니 국어, 영어, 국사, 사회, 수학, 이렇게 다섯 과목이었다. 국어, 국사, 사회, 세 과목은 쉽게 답안지를 작성했는데, 영어와 수학은 도저히 답을 쓸 수가 없었다. 과목낙제가 있었기 때문에 ‘영어와 수학 때문에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지선다형이니 체면상 연필을 굴릴 수는 없고, ‘기왕 떨어질 바에야 아무렇게나 쓰고 빨리 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
영어는 국어 답안지와 똑같이 작성하고, 수학은 적당히 작성해 제출하고 제일 먼저 나왔다. 원래 나는 성질이 급해 답안지를 쓰면 바로 제출하지, 다시 검토하지 않는다.
1주일 후 합격자 발표 날, 창밖으로는 보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이미 과목낙제라고 생각해 발표 보러갈 생각도 않고 빈둥대고 있었는데, 처가 합격자 발표 날짜를 잊지 않고 있다가 “왜 안 가느냐? 어서 가보기나 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래, 또 모를 일이니, 가보기나 하자’ 우산을 쓰고 시청으로 가 게시판 앞으로 다가갔는데, 이게 웬 놀라운 사건? 스무 번째에 내 이름과 수험번호가 붙어있었다. 기쁨보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18명으로 공고했는데 왜 20명을 합격시켰지? 모집공고대로 18명에서 잘랐으면 불합격인데, 합격선을 20명으로 긋는 바람에 꼴찌로 합격했구나!’ 싶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2명은 예비로 합격시켜 만반의 대비를 한다고 했다.---pp.78-79
나보다 3살쯤 더 먹고 산업계장이기도 해서 나름대로 존중해주었는데 번번이 반말지거리를 서슴없이 해서 많은 민원인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멱살을 틀어잡고 벽에다 대고 킥킥 소리가 나도록 조지면서 “이 새끼, 씨발이라고? 이 새끼, 아주 묘한 새끼 아니야? 야! 이 새끼야! 나도 우리 집에 문패 달고 아이들 학교 보내는 가장이다. 네 눈에는 내가 어린애로 보이냐? 이 새끼가 사람대접을 해주니까 뵈는 게 없냐? 이 새꺄, 이런 꼴을 우리 아이들이 보면 애비 체통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좆같은 새끼야!” 하면서 몰아붙였다.
동장이 나오면서 “신 주사, 왜 이래? 동민들이 보는 데서 이러면 돼? 그 손 놓고 이리 들어와!” 하며 나무라는 바람에, “내가 너 두고두고 지켜볼 거다. 네가 보기는 내가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나도 당당히 공채로 시험보고 들어온 놈이야. 너같이 좆도 아닌 공화당 쫓아다니며 선거운동하고 빽으로 들어온 줄 알아, 이 새끼야!” 하며 손을 놓고 물러났다.---pp.98-99
시골학교에 근무할 때는 학부모들이 교사를 존경하는 모습으로 대해다보니 어린이들도 자연스럽게 스승을 존경하며 따랐다. 그런데 도시학교에 와서 학부모들을 만나면 돈 봉투나 내밀면서 으레 첫 말로 “우리 아이가 반에서 몇 등이냐?”고 물었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이런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의욕이 없어 모른 척, “무슨 등수를 알고 싶으시냐? 씨름 등수냐? 달리기 등수냐?”고 역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도시학교에 와 근무해보니 학교를 찾는 분들은 대개 어머니들인데, 하루는 아버지가 찾아왔다. 어린이 문제로 상의를 하던 중 “이 아이는 공부보다는 다른 쪽으로 지도해주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그 아버지가 “그럼 선생질이나 시킬까요?” 했다. ‘이 아버지 말처럼 해먹을 것 없으면 선생질이나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왔나보구나.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이 책임이 우리 교사들에게는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pp.177-178
내가 만난 수많은 장기수 선생들은 하나같이 아주 얌전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온화한 이웃 할아버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옛날 선비라는 사람들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김동기 선생은 어찌나 노익장을 과시하던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야기도 논리가 정연한데다, 활달하긴 얼마나 활달한지 정말로 넋 놓고 바라봐야 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말도 거침이 없었다. 말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도 말할 틈이 없으니 그대로 듣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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