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과거로 돌아왔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정말 이야기 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말하자면, 그건 알게 모르게 귀족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단골 소재였다. 다들 앞에서는 품위 없다며 비아냥거렸지만, 암암리에 한 번씩은 구해 읽곤 했던 것.
덧붙이자면 심심풀이로 입에 밀어 넣는 간식 같은, 그런 부류의 글을 나 역시도 읽은 적이 있었다.
여주인공은 누군가에게 비극적으로 죽임당해 불행히 생을 마감한다.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깨어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아침.
여주인공은 혼란스러워하지만 금방 적응하고, 끝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적을 온화함과 사랑의 힘으로 귀화시킨다. 남자 주인공과의 애절한 사랑은 보너스.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주인공이 내가 된다면 말이 좀 다르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살아오며 했던 짓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겨운 예절 수업과 아버지의 잔소리, 심지어는 다른 영애들과의 신경전까지도 말이었다.
누구든 살면서 되돌리고 싶은 일들이 하나쯤은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파티에서 치마에 와인을 엎질렀다거나 하는 별것 아닌 일들뿐, 지금껏 내가 살아온 시간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신인지 조물주인지 모를 이 주최자가 간과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무척이나, 몹시도, 끝내주게.
나는 소설 속 여자 주인공처럼 적이 많지도 않았고, 내 잘남을 시기하는 영애들의 견제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며, 심지어는 나를 끔찍이 위해주는 사랑스러운 연인도 있었다!
약혼자의 이름은 루센 그레미오.
달콤한 금발에 청량한 푸른 눈을 가진, 매혹적이지만 또한 남자다운 생김새, 심지어는 검술 실력까지 어디 한 곳 빠지지 않는 나의 기사. 우리의 연애는 순조롭고 찬란했다.
그와 나의 첫 만남은 내 가까운 친우 로제의 생일 파티에서였다. 막 시골에서 상경한 상태였지만 루센은 고위 귀족들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품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매너들이란. 그가 산골짜기에서 올라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루센의 본래 태생은 그레미오 후작가의 먼 친척인 작은 남작 가문이었다. 그러나 후작이 씨 없는 참외였는지 후작 부인의 밭이 황무지였는지, 후작가엔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었다.
첩에게서도 자식을 보는 데 실패한 후작은 결국 먼 방계에서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루센이었다.
후작은 루센을 도성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러고는 훌륭하게 자라난 그를 보고 흡족해하며 후계자로 못 박았다.
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뿐인 지겨운 사교계에서 새 얼굴의 등장은 충분히 화젯거리였다.
심지어 그 소문의 주인공이 풍채 좋은 미남이라니, 뭇 여인들은 가슴에 사랑을 앓으며 무수한 연애편지를 써 내렸다. 후작가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초대장에 노년의 집사가 곤혹스러워했다는 후문도 돌았다.
멍청한 아가씨들. 연애편지는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은걸. 그것도 루센처럼 무심한 남자에게는 말이다.
루센의 손끝엔 많은 여인들의 장갑이 스쳐 지났으나, 결국 그를 독차지한 것은 바로 나였다.
마침내 그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무릎을 꿇어 보였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고백했다. 저와 혼인해주겠느냐고.
나는 기쁨에 겨워 그에게 몇 번이고 답해주었다.
「물론이지요, 루센.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당신의 신부가 되어 영원히 그대와 함께하겠어요.」
양가 모두가 축복하는 행복한 화합이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극의 신부도, 정략결혼에 고뇌하는 무뚝뚝한 신랑도 없었다.
결혼식 전날, 나는 그레미오라는 성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며 잠에 빠져들었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시간은 3년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게 대체.
잠에서 깨자마자 흥분해 웨딩드레스를 찾는 내게 하녀인 레이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남겼다. 그만 잠에서 깨시라고, 아가씨는 결혼할 애인조차 없지 않으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 멍청한 문답을 열댓 명쯤과 반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어쩌면 내가 미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머리 상태는 너무나 멀쩡했다. 그리고 기억 속 과거의 일이 몇 번이고 들어맞고 나자 겨우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 맞다고.
그 깨달음의 기간이 꼬박 3개월이었다. 스스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그 시간은 발광하고 소리 지르고 방에 틀어박히는 복장 터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내 딸이 미쳤다며 매일 울었다.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점잖게 혀를 찼다. 항상 나를 이해해주던 오라버니 알테조차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카렌, 휴양지에라도 다녀오렴. 정신이 맑아질 거야.」
부드러운 투였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뜻은 명료했다. 네가 지금 좀 정상이 아니구나?
나는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둥의 믿기 힘든 주장은 존중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참으로 엿 같지만 돌아온 이 내 인생, 다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얌전해진 나를 보고 식솔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일들을 언급하며 내 주장들을 농담거리로 전락시켰다.
「살기가 심심해서요. 장난 좀 쳐봤어요.」
우아한 투로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부모 걱정을 그렇게 시키더니 그게 다 가족들을 놀리려고 한 짓이었느냐며 뒷목을 붙잡으셨다.
하녀들은 그런 어머니를 부축하며 나를 불안한 눈으로 흘끔거렸다. 사용인들이 언제나 상냥했던 내게 지어준 친절한 아씨라는 별명이 또라이 아씨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은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원래 못하던 사람이 잘하면 괜히 달라 보이고, 잘하던 사람이 못하면 더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내게 경계의 시선을 보내던 하녀들의 얼굴을 가슴 깊이 새겨놓았다. 앞으로 너희는 지속적으로 또라이 아씨의 출현을 보게 될지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내 전담 하녀 레이가 금방 적응을 마쳤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제 친구인 다른 하녀들에게 이렇게 변명했다.
「아가씨가 원래 좀 깜찍하시잖아요.」
그녀의 친우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리플렉츠가는 다시 조용해졌다.
“아가씨, 요샌 그 소리 안 하세요?”
“뭐가?”
“아가씨가 미래에서 오셨다는 얘기.”
레이가 내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물었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다시 시작이다. 나를 놀리고 싶은 레이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고작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었던 레이와 그것을 실제로 겪은 나 사이에는 크나큰 온도 차가 존재했다.
“농담이었다니까.”
내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만 치우라는 듯 머리를 까딱였지만, 레이는 아랑곳 않고 꼼꼼히 내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그렇지만 저희는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얼마나 경황이 없으셨는지 로제 아가씨 생신 파티에도 참석 안 하시고. 로제 님이 많이 서운해하시던데.”
나는 그대로 제자리에 굳었다. 감고 있던 눈은 어느새 번뜩 뜨인 채였다. 자리를 박차고 그대로 뛰쳐나갈 심산이었지만, 그만 치맛자락이 다리에 엉겨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악!”
무릎을 감싸 안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입가에서 된소리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의 자제력을 동원해 억눌렀다.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뿌득뿌득 가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관절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관절 간수 따위가 중요한 때는 아니었다. 아파한 것도 잠시,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레이를 붙잡았다. 귀신 같은 내 몰골에 레이가 두렵다는 듯 걸음을 뒤로 물린다.
안 잡아먹어. 얘, 그러니까…….
“오늘이 며칠이지?”
내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레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다그쳤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아가씨, 그건 갑자기 왜…….”
“달력, 달력! 달력 줘봐!”
내 몸을 지탱해주던 레이가 재빨리 명령을 따라 자리를 떠난 통에 그만 자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는 카펫 문양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아닐 거야.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의아한 얼굴의 레이가 달력을 들고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녀가 “여기요.” 하고 내미는 종이를 다급하게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2주 전이었다, 로제의 생일 파티는. 어떻게 이걸 잊고 있을 수 있었을까.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늘에 신이 있다면 3년이란 추억을 앗아 간 것도 모자라 내 입에 친히 엿까지 쑤셔 넣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흡사 다 죽은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생일 파티에…… 못…… 갔어…….”
“괜찮아요, 아가씨. 로제 님도 이해해주실 거예요.”
레이가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나는 광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레이가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퇴로를 찾는 듯 두 눈이 조심스레 문가를 찾는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미끄러진 자세 그대로 몇 번이고 말을 반복했다. 레이는 도망갈 것인지 주인을 챙길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걱정스러운 투로 “괜찮으세요?” 하고 다시 나를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 미소라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은 도저히 대답해줄 정신이 없었다.
못 갔다.
과거에 루센을 처음 만났던 곳, 로제의 생일 파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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