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대학원에서 북한을 공부하려 하지요? 북한이 곧 망할지도 모르는데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6년 겨울, 일본 도쿄대 대학원 박사과정 진학을 위한 구술고사장에서 어느 일본인 교수가 필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 “북한이 쉽게 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설령 일찍 망한다고 해도 당분간은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봅니다. 초기에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과 씨름을 하고, 시간이 지나 상황이 안정되면 북한의 역사를 차분하게 재정리하는 일을 하면 되겠지요.”---p.3
2007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시장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은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북한정부의 의지가 있다고 해서 시장화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정부가 과거의 계획경제로 회귀하고 싶어도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계획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 북한정부가 공장·농장 등 생산주체에게 내리는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수단, 즉 자원과 자본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p.100
2009년부터는 종합시장의 순차적 폐쇄, 특히 농민시장으로의 환원도 시도되었다.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시행이 연기되기는 했지만 2009년 1월부터 전국의 시장을 농민시장으로 개편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5월부터는 150일 전투, 100일 전투를 추진하면서 주민들의 시장경제활동에 실질적인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6월에는 북한의 대표적인 전국적 도매시장인 평성시장에 대해 폐쇄 결정을 내렸다. 11월 말에는 화폐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 계획경제 복원 및 시장경제활동 억제에 대한 의도를 보다 명확히 드러냈다. …… 하지만 이는 단속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공간에 한해서의 이야기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시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일부는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종합시장의 안과 밖, 특히 암거래까지 포함하면 시장 참여자와 거래물품은 종전과 큰 차이가 없다. “위에서 정책이 있다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라는 주민들의 말처럼 주민들은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어 단속을 피해가고 있다.---pp.79-81
주민들이 달러, 위안화 등 외화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즉 북한에서 달러화가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북한의 시장에서 물가가 결정될 때 환율 요인, 투기적 요인, 기대심리 요인 등이 얼마나 작용하는지, 북한에서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등에 대한, 즉 양적인 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북한 화폐개혁의) 실패의 수준, 정도에 대한 판단은 매우 어렵다. 결국 성공 및 실패라는 두 개의 극단적 시나리오 사이의 어디인가에 현실세계는 존재할 것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북한 내부의 대혼란, 심지어는 폭동, 더욱이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p.125
무역분권화 조치는 중앙당국의 의도적인 권한 이양이라기보다는 중앙의 힘의 약화에 따른 사실상의 분권화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무역분권화가 무역회사를 비롯해 하부 경제단위의 ‘자력갱생’과 함께 추진되었다는 점에서도 국가 권력의 무능화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무역회사의 운영에 대해 자금 지원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무역회사 및 개인이 벌어들인 수익금의 상당 부분을 수취하는 ‘약탈자’적 성격도 드러내고 있다.---p.173
북한의 시장화는 방임적 시장화이다. 달리 말하면 시장화는 기업과 가계 등 하위 경제주체들의 자력갱생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 기업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시장경제적 활동을 용인하되, 국가는 기업에 대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 자본, 원자재 등을 공급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정부가 지향하는 것은 관리가능한 시장화이다. 즉, 시장화를 확대하되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묶어두겠다는 것이다.---p.269
김책제철소 같은 큰 기업소에는 대형 급동실이 있다. 체육관 안에 있다. 운동을 해서 땀을 많이 흘리면 이걸 이용해서 시원한 음료수를 먹으라고 국가에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운용이 되지 않고 개인수공업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 여기도 먹고 살자니까 어쩔 수 없다. 김책제철소도 한여름엔 이걸로 돈 번다. 한여름에 제철소는 국가에서 전기를 받게끔 되어 있으니까. 그러면 청진시 주민들이 원료를 지고 와서 몇 백 미터 줄을 서서 자기 것을 급동실의 어느 칸 어느 구역에 다 넣고 간다. 예컨대 얼음과자 같으면 2~3시간만 기다리면 다 언다. 그러면 그것을 꺼내어가서 팔러 다닌다(탈북자 P2 씨의 증언에서).---p.358
우리는 흔히 1990년대 하면 경제위기의 시대로 이해하곤 한다. 물론 그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1990년대의 현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위기가 초래한, 아니 강제한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방경제라는 창(窓)이 1990년대 북한의 변화에 대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지방경제 그 자체의 변화보다도 지방경제 운용체계 변화가 몰고 온 파급효과이다.
---p.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