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몹쓸년의 창 앞에서
작년 가을, 내가 있는 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마당에 어느 날 텐트 하나가 쳐졌다. 당시 고통스런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학교가 온통 힘들었던 시기이다. 황지우 전 총장이 사표를 낸 뒤 시간 강사 위촉이 취소되자 학생 중 하나가 황 교수의 강의를 듣고 싶다며 일인 텐트 농성이 시작된 것이다. 외로운 텐트의 노란 창. 하지만 날이 갈수록 텐트는 하나 둘 늘어나 작은 마을을 이루어버렸다. 텐트 하나의 힘.
그 텐트의 창 앞에 작품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펼쳐보았다. 만화였다. 읽어 나가니 좀 맹맹하다. 특별히 매력적인 그림체도 아니고 예리한 연출도 아니어서 심심한 채로 그만 볼까 하다가 이왕 집은 것이니 하고 넘겨보았다. 역시 파도 같은 짜릿한 작품도 아니고 천둥 번개가 치는 충격적이거나 감동적인 작품도 아니었다. 그런데 묘한 여운이 남는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잊을 수 없는 그림자를 마음에 남기는데 이게 뭐지?
기승전결도 굳이 없는 이야기는 30대 미혼 여성으로 사는 일을 마치 싱크대 앞 도마 위에 저녁거리 고등어를 툭 반 토막 내어 놓은 것처럼 그냥 보여준다. 아니 고등어 째로 그냥 던져놓은 것 같다. 그러나 세숫대야 안의 물같이 평범하고 작은 일렁거림이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림도 묘한 자유로움과 매력을 더하고 기승전결을 넘어버린 연출 또한 그 담담함이 심상찮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솜처럼 느껴지던 것이 무언가에 한 방울 두 방울 젖어들어 점점 눅눅해지더니 나중엔 물에 젖은 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우리의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마침내 가슴을 시리게 하고 마는 것이다.
이 시대 여성의 삶. 우리의 삶. 그 긴 그림자.
그리고 다시 텐트의 창을 바라본다. 그래서 텐트의 주인, 이 몹쓸년의 작품을 들고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나는 서 있었다.
박재동(만화가,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내가 살지 않았던 삶에 대해 듣는 것은 생경하고 뭉클한 경험이다. "내가 하지 않은 것들 안에 어떤 행복이나 삶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라는 작가의 말은 우리가 느끼는 생경함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 뭉클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내가 살지 않았던 삶에서 내 삶의 근원을 보는 듯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의 삶이 근본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을 것이고, 낯선 삶에 비추어 보니 내 삶이 비로소 보이더라는 깨달음일 수도 있을 것이고, 삶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같은 언어를 가진 이로서의 공감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언어. 그것은 한국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 시킬 때, 풍경 속의 외로운 등을 지울 것처럼 드러낼 때, 아무도 없는 거리에 늘어진 전봇대의 그림자를 꾸물꾸물 그려 넣을 때, 그 풍경 속에서 그녀가 내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숨소리이거나 알아듣기 힘든 끊어진 단어일 수도 있지만, 또한 힘이기도 하다. "이해받고 싶다. 아니, 이해하게 하는 게 힘인 거 같다"라며 작가 스스로가 갈망하는 힘. 힘없어서 역설적으로 가능한 힘. 귀 기울이게 하는, 그런 힘. 그 힘으로 이 한 권의 책이 채워졌다. 이 책 안의 수많은 말줄임표를 헤아리는 것 또한, 생경하고 뭉클한 경험이 될 것이다.
박사(북 칼럼니스트,『고양이라서 다행이야』『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저자)
내가 가장 객관적이라며 손을 번쩍 들어 모두가 아웅대는 시끄러운 세상 위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직한 것들은 대개 치열한 주관으로부터 발견된다. 그래서 나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몹쓸년》은 작가 자신과 주변의 풍경을 담은 이야기다. 그저 막연히 기록되기보다 꼼꼼히 사유되고 있는 이 풍경들은 언뜻 아름답지만, 사실 무언가를 규명해내려는 분투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는 ‘나’에 대한 이야기란 결국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소박하지만 세심하고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글과 그림을 만난 게 기쁘고 다행스럽다.
허지웅(칼럼니스트,『대한민국 표류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