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05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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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56쪽 | 534g | 153*224*30mm |
ISBN13 | 9788991274518 |
ISBN10 | 899127451X |
발행일 | 2010년 05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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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56쪽 | 534g | 153*224*30mm |
ISBN13 | 9788991274518 |
ISBN10 | 899127451X |
1. 스쳐간 순간이 역사가 되고 2. 대문 빗장은 걸어도 창문은 열다 3. 요시다 쇼인의 밀항, 그리고 운명의 회항 4. 회천의 기수, 다카스키 신사쿠 5. 죽어도 뜻이 남는다면 6. 동쪽으로 가다 7. 요시다 쇼인의 긴 그림자 8. 오늘도 소나무는 자란다 참고문헌 고종과 메이지시대 연표 |
경술국치"를 아시나요? 그렇다면 "한일합방"은 아시나요? 그런데 둘다 같은 말입니다.
한일합방은 알아도 경술국치하면 모르는 것은 저만이 아닐겁니다.
1910년 8월 29일. 8월 보훈카페의 미션으로 역사적 그날을 취재하기 위해 8월 남은 기간은 공부에 들어갑니다.
우선 경술국치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진행과정을 알아야겠기에 책의 힘을 빌려 봅니다.
교보문고에서 '경술국치'로 검색하니 2권의 책이 나오고, 도서관에서 검색하니 1권이 추가로 더 나옵니다.
"죽어야 사는 나라 [조선과 일본]" ,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 강화도 사건에서 경술국치까지 일본 명치제국의 죄악"
모두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에 발간된 책들입니다.
그 중에서 '죽어야사는 나라'를 먼저 읽어봅니다. 가깝지만 먼나라 '일본' 그 역사이야기인데 감정이 남아 있어서인지 내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경술국치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등 익히 들었던 인물들이 모두 동향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막부 말기 요시다 쇼인이 세운 시골 학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라고 하니.... 그것도 서른살에 죽음은 청년이 세운 시골 학숙입니다. 일본의 60분의 1에 불과한 1개 번이 어떻게 조선을 삼켰을까?
일본은 260여개 군소 국가(번)의 독립국가연합과 같은 형태였다. 비록 막부의 쇼군이 각 번의 영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영지 내부의 통치에 관한 한 각 번은 독립국가와 다름없는 자주권을 갖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10만석 이상의 석고(영지의 쌀 생산량)를 보유한 27개 웅번은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력이 100만석에 이르는 거대한 웅번이 나타나 상호 경쟁하면서 막부체제의 대항세력으로 성장한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는 운이 따랐다. 비록 무력을 동원하여 개국을 강요하기느 하였으나 영토 침탈에 전혀 야욕이 없는 미국이 첫 손님으로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1854년)시킨 미국이 곧 이어 터진 남북전쟁(1861년~1865년)으로 기껏 열어 놓은 일본 시장에 들어올 여력이 없었다. 또한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크림전쟁(1853년~1856년)으로 유럽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일본에 영향력이 컸던 4국이 결정적인 시기에 국운을 건 전쟁으로 일본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이 기간동안 내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 일본에게는 두 번째 행운이었다.
죠슈와 사쓰마에서 도발로 미국, 영국등의 공격을 받지만 이를 계기로 해양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해 무역에 일찍 눈이 뜨였다. 개화문ㅁ루의 수입으로 근대화에 눈을 뜬 죠슈와 사쓰마 번은 유신의 주도세력이 된 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근대화를 위한 혁명은 대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일본은 공화정의 속성을 가진 막부체제를 뒤엎고 강력한 왕권을 내세운 절대주의 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로써 근대화를 위한 국가체제 정비에 국력을 올인하여 압축성장 하여, 단시간에 높은 수준의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1867년 10월 막부의 대정봉환으로 쇼군 요시노부가 사임함으로 즉위 1년 만에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친정에 나선 왕 메이지.
막부의 저항군을 완전히 소탕한 하코다테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국을 장악한다. 하지만 다이묘를 자신의 영지에 그대로 지사로 재임명한다.
내란이 끝나자 1870년대 말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 의회 설립에 대한 요구가 분출된다. 하지만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근대화 초기에 민주정체를 도입한 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한경우 가 없다는 점을 내세워 이토 히로부미가 민권운동의 싹을 잘랐다. 이른바 '메이지 14년(1881)의 정변'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낵가제 도입(1885), 헌법제정(1889), 의회개설(1890)의 근대화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폐번지현이 단행된 1871년을 일본의 근대국가체제 출발점이라고 본다면, 그로부터 10년 동안 일본은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중간 시점인 1876년에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기는 하였으나 ,정한론의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분출시킨 것에 불과했다. 곧이어 터진 사쓰마의 세이나전쟁으로 조선 경략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조선에게는 이 기간 약 10년의 세월이 일본의 병탄 야욕을 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1882년 7월 임오군란으로 청국군이 한양에 상주하면서 조선의 자주성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1884년 12월 김옥균 일파의 갑신정변으로 일본이 조선에 출병할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의 북양대신 리홍장은 1885년 4월 텐진에서 '향후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어느 한쪽이 출병할 경우 이를 문서로 통보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다.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출병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조약이었으나 영토주권자인 조선은 협약에서 배제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은 이 조약이 빌미가 되어 조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와 이토 히로부미의 등장 배경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보다 20년 개항에 뒤지면서 나라의 운명이 다하게 되었습니다. 신권이 강한 조선의 패망에 대한 책임을 고종이 다 떠안하야 할까요?
유교와 성리학에 발이 묶인 조선. 조선말 개항 전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잘 활용하였다면, 아니면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하였을 때 잘 이용하였다면.....
김옥균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와의 통상을 잘 성립시켰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이 단어가 아쉽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