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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나라

죽어야 사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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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5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356쪽 | 534g | 153*224*30mm
ISBN13 9788991274518
ISBN10 899127451X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1. 스쳐간 순간이 역사가 되고
2. 대문 빗장은 걸어도 창문은 열다
3. 요시다 쇼인의 밀항, 그리고 운명의 회항
4. 회천의 기수, 다카스키 신사쿠
5. 죽어도 뜻이 남는다면
6. 동쪽으로 가다
7. 요시다 쇼인의 긴 그림자
8. 오늘도 소나무는 자란다

참고문헌
고종과 메이지시대 연표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광훈
이른바 ‘58년 개띠’로 출생했으나, 영아사망율이 높았던 까닭에 1년6개월이 지나서야 생존가능성을 인정받고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30리길을 도보와 자전거로 통학하며 시골 중학교를 나와 경쟁입시 마지막 학번으로 대구에서 고등학교 입시를 치렀으나, 사상 초유의 입시부정사건으로 당시 교육감이 자살하고 시험이 무효처리되는 소동으로 재시험을 치른 끝에 합격하여 대구 유학길에 올랐다.
사립대 등록금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던 등록금 때문에 지방 국립대를 지방 국립대를 진학했고, 글쓰기와 역사 탐구에 매료되어 사학과를 가고 싶었으나 취직이 잘된다는 이유 하나로 영문과를 선택했다.
결국 글쓰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여 15년간 재직. 그 후 개인사업을 하면서도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아, 서울대 인문대에서 개설한 AFP과정을 수료하면서 뜻이 맞는 CEO들과 함께 동아시아 근대사 공부에 빠져들어 이 책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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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메이지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을 타고 났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다. 고종은 1852년 7월25일, 메이지는 같은 해 11월3일, 모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메이지는 제1황자가 1850년 태어나자마자 죽었기 때문에 천황이 될 수 있었고, 고종은 조대비와 대원군의 묵계에 따라 형인 재면載冕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고종은 1863년 12월, 메이지는 1866년 12월에 3년의 시차를 두고 왕위를 승계했다.
일본이 양이와의 일전을 계기로 근대화의 대장정에 박차를 가했던 반면,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문을 굳게 닫아걸어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메이지가 사무라이에 대한 ‘폐도단발령廢刀斷髮令(1871년 8월)’을 내리고 스스로 머리를 자른 때는 1873년이었고, 고종은 22년 후인 1895년에야 상투를 잘랐다. 개국의 시차 22년, 꼭 그 기간만큼 시차가 벌어졌다. --- pp.258-259

이토 히로부미 사망 30주기를 앞둔 1939년 10월15일 오전 11시.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松澤龍雄(송택용웅)의 손에 이끌려 한 조선청년이 이토 히로부미의 보리사菩提寺(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에 나타났다. 청년은 히로부미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뒤, 추선법요追善法要(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예불)를 봉행했다. 다음날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는 7면 톱기사로 ‘망부亡父의 사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운명의 아들 안준생 이토공 영전에 고개 숙이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청년은 안중근의 아들 준생俊生이었다. 총독부가 연출한 이 비극의 드라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준생은 조선호텔에서 당시 일본광업공사 사장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伊藤文吉(이등문길)를 만났다. 이 장면은 10월18일자 ‘매일신보’에 ‘극적인 대면,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영원한 화해)’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다음날 준생과 분기치는 함께 박문사를 참배했다. 준생은 분기치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고 말했다. 이 일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주요 신문에 ‘참된 내선일체’의 상징적 사건으로 대서특필됐다. --- p. 300

-오늘의 마쓰시다정경숙이 일본에 기여하는 바가 쇼카손주쿠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재앙으로 작용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역사의 반복을 경험한다’고 했던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다른 누구보다 식민통치의 경험을 겪었던 한국에 주는 엄정한 경고다. 30년의 세월을 쏟아부어 정권교체의 간성을 길러낸 일본의 저력을 과소평가한다면, 역사는 똑 같은 치욕의 반복을 통해서 그 미몽迷夢에 복수를 할 것이다.
‘쇼카松下’에서 ‘마쓰시다松下’로, 소나무는 오늘도 자라고 있다.
--- pp.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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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 민족사의 최대 치욕인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 되는 해이다. 광복 후 우리 학계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원인을 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다양한 시각의 연구결과를 축적해왔다. 일제강점의 일정한 역할을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등 학계 일각의 논쟁적인 연구도 없지 않지만 그동안의 연구는 대부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 다시 말해 우리의 시각에서 이뤄져온 것도 사실이다.

『죽어야 사는 나라 -조선과 일본』은‘경술국치 100년, 병탄의 뿌리를 캐다’는 부제가 말해주듯 19세기 말 근대화라는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 한국과 일본의 대처 방안을 비교 분석하되, 주로 일본 측의 시대상황과 당시 조선에 대한 인식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일본 현지답사를 토대로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明治)유신을 이끈 주역들의 삶의 궤적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다.

필자의 초점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개인 학숙을 열어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주역들을 제자로 길러 기라성같이 남겨놓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필두로 하여 메이지유신, 근대화, 조선강점을 주도한 핵심인물들에 맞춰져 있다. 스승의 유업을 완성한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晉作), 죠슈(현재의 야마구치현)인맥의 대부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조선강점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제국 육군의 태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바로 쇼인의 제자들이었다.

다다미 8장의 초라한 시골 학숙에서 참의(參議, 메이지유신 초기 신정부의 국무를 총괄하던 태정관太政官의 최고위직) 2명, 총리대신 2명, 대신 3명이 나왔고 그 계보를 따라 총리대신 3명이 더 나왔다. 특히 육군대장을 비롯한 장군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그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제자 90명 중에서 특히 재주가 출중하여 ‘4천왕四天王’이라 불린 4명의 준재들은 스승의 수명조차도 누리지 못하고 요절했다. 그들이 그렇게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해, 일본 근대화의 새벽을 연 메이지유신이 단행됐다. 준재들이 떠난 빈자리를 그 뒷줄에 섰던 남은 제자들이 차고나와 일본의 근대화를 완성했다.

쇼인에게 ‘남자가 죽을 때’를 물었던 수제자 다카스키 신사쿠는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후 약 50년간 내각과 군부의 실세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두 명의 주역을 키워 놓고 죽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이들이 제국의 아침을 열던 그때 나이도 스승인 요시다 쇼인과 마찬가지로 30대였다. 유신 뒤 일본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죠슈 인맥은 이토 히로부미를 정점으로 한 내각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정점으로 한 군벌로 양분 되는데, 특히 존재감이 부각됐던 인물들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육군 군벌이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죠슈번에서 나온 5명의 총리대신 중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한 4명(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가쓰라 다로, 다나카 기이치)이 모두 육군 대장 또는 원수였다는 사실만 봐도 군부 쪽의 죠슈 인맥이 훨씬 막강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요시다 쇼인이 길러낸 죠슈 인맥이 조선강점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는 점이다. 한일합병을 진두지휘한 이토 히로부미, 무력에 의한 합병을 강행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합병의 초석을 깐 이노우에 가오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 고로, 2대 조선통감을 지낸 소네 아라스케,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 3.1운동의 원인을 제공한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을사조약과 한일합병 당시 총리로 모든 과정을 총지휘한 가쓰라 다로. 한일합병의 기획과 추진, 완결이 이들 8인에 의해 전단되었는데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죠슈번, 그것도 대부분 ‘하기(萩)’ 출신이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 서남단의 일개 번에 당한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애니메이션 ‘은혼(銀魂, 2004년 소라치 히데아키空知英秋가 ‘점프’지에 연재한 만화를 원작으로 2006년 TV도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한국에서도 방영)’은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극 중의 다카스키 신스케(高杉晉助)가 바로 다카스키 신사쿠, 가츠라 고타로(桂小太郞)는 가쓰라 고고로, 사카모토 타츠마(坂本辰馬)는 사카모토 료마, 요시다 소요(吉田松陽) 선생이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는 한국의 근현대사 교육에도 등장하지 않는 숨겨진 인물이지만, 많은 한국 청소년들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셈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의 근대사를 한국 청소년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하여 대부분 다 배우고 있는 셈이다. 정사(正史)는 모르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미화된 이미지로만 일본의 근대사?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1830년 죠슈번에서 출생한 요시다 쇼인은 병학사범으로 그 천재성을 인정받은 수재였다. 쇼인이 1858년 12월26일 막부에 대한 반역모의로 다시 노야마옥에 수감될 때까지 쇼카손주쿠를 거쳐 간 숙생은 모두 92명이었다. 쇼인이 강론을 외부에 개방하기 시작한 1856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면 2년 10개월, 정식으로 쇼카손주쿠를 개설한 1857년 11월부터 보면 불과 1년 2개월의 짧은 기간에 그처럼 많은 제자를 두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문호를 활짝 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가르침에 혹한 제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출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배움의 기회가 열린 계기도 쇼인의 이런 파격 덕분이었다 쇼카손주쿠와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는 소리를 질러도 들릴만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요시다 쇼인의 은덕을 입은 또 한명이 일본제국 육군의 태두 야마가타 아리토모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보다 출신 성분이 조금 나았지만 미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시다 쇼인은 노야마옥에 수감돼 있을 때 이런 글을 남겼다.

'국력을 배양해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국부와 토지는 선,만(鮮·滿,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쇼인은 역사서라기보다는 픽션에 가까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맹신자로 ‘신공황후설(神功皇后說,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인물)’을 굳게 신봉했다. 그에게 조선을 취하는 것은 일본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국체의 완성’이라는 대업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신성(神聖)의 도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을 경(敬)하였으니 국체의 정립을 위해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막부타도 논리의 얼개였다. 쇼인의 이름자를 풀이하면 ‘소나무松 그늘陰’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백리’라고 하지만, 서른에 요절한 요시다 쇼인이 남긴 그림자는 반도 삼천리를 삼켰다. 이데올로그로서 쇼인은 정한론의 뿌리였고, 조선 병탄의 주역 8인은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였다.

막부 중신에 대한 암살모의 혐의로 수감된 쇼인은 사형 판결이 내려지기 하루 전날 장문의 유서를 남겼다. 그는 10월26일 사형 판결을 받고 그 다음날 바로 처형됐다.
쇼인은 유서에서“막부 및 제번(諸藩)의 무사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신분에 관계없이 풀숲과 같은 곳에 사는 민초를 일으켜 세워 체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의 ‘초망굴기(草莽?起)’론이다. 이 유훈은 수제자인 다카스키 신사쿠에 의해 실현되어 메이지유신의 초석이 되었고, 쇼인이 뿌린 막부 타도와 왕정복고의 원념(怨念)은 그의 제자들이 흘린 피로 완성된다.

쇼인의 일생을 바꾼 스승은 사꾸마 쇼잔(左久間象山)이었다. 국수주의자였던 그의 밑에서는 요시다 쇼인을 비롯하여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막부와 유신세력의 충돌을 슬기롭게 잘 수습한 가쓰 가이슈(勝海舟, 막부 해군총독으로 유신 후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담판으로 신정부군의 에도성 무혈입성을 주선), 메이지유신의 막후 설계자로 죠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을 주선하여 결정적 전기를 마련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나가오카번(지금의 니가타현)의 수석가로였던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繼之助)와 고바야시 도라사부로(小林虎三郞) 등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큰 족적을 남긴 제자들이 배출됐다. 개항기와 같은 전환기에 이런 사상가가 있었고 그 제자들이 당시 상황을 주도한 주역들이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주어진 큰 행운이었다.

필자는 서문에서 근대화 여명기에 변혁의 주체가 되었던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생사관과 국가관의 차이를 이렇게 분석한다. “일본은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무라이들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에 목숨을 던졌다. 서구 열강의 외세 공략에 앞서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며 수백 년 간 누적된 갈등과 모순을 정리하고 자존의 기반을 마련했다. 초야의 이름 없는 사무라이들이 근대화를 향한 열정으로 자신의 이념에 목숨을 던졌고, 그 죽음으로 나라는 살았다. 당시 일본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진동과 같은 지사들이 넘쳐났다. 조선은 그와 같은 치열한 내부적 갈등과 혁신의 몸부림이 상대적으로 매우 약했다. 망국에 즈음해서야 초야의 선비들이 의병 봉기를 통해 일어섰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었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자 했던 동기가 달랐고, 결정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한 시점의 선택에서 한 세대의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 차이가 국운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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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나라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기* | 2015.08.14 | 추천0 | 댓글1 리뷰제목
경술국치"를 아시나요? 그렇다면 "한일합방"은 아시나요? 그런데 둘다 같은 말입니다. 한일합방은 알아도 경술국치하면 모르는 것은 저만이 아닐겁니다.​ 1910년 8월 29일. 8월 보훈카페의 미션으로 역사적 그날을 취재하기 위해 8월 남은 기간은 ​공부에 들어갑니다. 우선 경술국치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진행과정을 알아야겠기에 책의 힘을 빌려 봅니다. 교보문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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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를 아시나요? 그렇다면 "한일합방"은 아시나요? 그런데 둘다 같은 말입니다.

한일합방은 알아도 경술국치하면 모르는 것은 저만이 아닐겁니다.​

1910년 8월 29일. 8월 보훈카페의 미션으로 역사적 그날을 취재하기 위해 8월 남은 기간은 ​공부에 들어갑니다.

우선 경술국치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진행과정을 알아야겠기에 책의 힘을 빌려 봅니다.

교보문고에서 '경술국치'로 검색하니 2권의 책이 나오고, 도서관에서 검색하니 1권이 추가로 더 나옵니다.

"​죽어야 사는 나라 [조선과 일본]" ,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 강화도 사건에서 경술국치까지 일본 명치제국의 죄악"

모두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에 발간된 책들입니다.

그 중에서 '죽어야사는 나라'​를 먼저 읽어봅니다. 가깝지만 먼나라 '일본' 그 역사이야기인데 감정이 남아 있어서인지 내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경술국치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등 익히 들었던 인물들이 모두 동향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막부 말기 요시다 쇼인이 세운 시골 학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라고 하니.... 그것도 서른살에 죽음은 청년이 세운 시골 학숙입니다. 일본의 60분의 1에 불과한 1개 번이 어떻게 조선을 삼켰을까?​

일본은 260여개 군소 국가(번)의 독립국가연합과 같은 형태였다. 비록 막부의 쇼군이 각 번의 영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영지 내부의 통치에 관한 한 각 번은 독립국가와 다름없는 자주권을 갖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10만석 이상의 석고(영지의 쌀 생산량)를 보유한 27개 웅번은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력이 100만석에 이르는 거대한 웅번이 나타나 상호 경쟁하면서 막부체제의 대항세력으로 성장한다. ​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는 운이 따랐다. 비록 무력을 동원하여 개국을 강요하기느 하였으나 영토 침탈에 전혀 야욕이 없는 미국이 첫 손님으로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1854년)시킨 미국이 곧 이어 터진 남북전쟁(1861년~1865년)으로 기껏 열어 놓은 일본 시장에 들어올 여력이 없었다. 또한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크림전쟁(1853년~1856년)으로 유럽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일본에 영향력이 컸던 4국이 결정적인 시기에 국운을 건 전쟁으로 일본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이 기간동안 내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 일본에게는 두 번째 행운이었다.

 죠슈와 사쓰마​에서 도발로 미국, 영국등의 공격을 받지만 이를 계기로 해양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해 무역에 일찍 눈이 뜨였다. 개화문ㅁ루의 수입으로 근대화에 눈을 뜬 죠슈와 사쓰마 번은 유신의 주도세력이 된 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근대화를 위한 혁명은 대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일본은 공화정의 속성을 가진 막부체제를 뒤엎고 강력한 왕권을 내세운 절대주의 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로써 근대화를 위한 국가체제 정비에 국력을 올인하여 압축성장 하여, 단시간에 높은 수준의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

 1867년 10월 막부의 대정봉환으로 쇼군 요시노부가 사임함으로 즉위 1년 만에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친정에 나선 왕 메이지.

막부의 저항군을 완전히 소탕한 하코다테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국을 장악한다. 하지만 다이묘를 자신의 영지에 그대로 지사로 재임명한다.

내란이 끝나자 1870년대 말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 의회 설립에 대한 요구가 분출된다. 하지만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근대화 초기에 민주정체를 도입한 나라가 부국강병에 성공한경우 가 없다는 점을 내세워 이토 히로부미가 민권운동의 싹을 잘랐다. 이른바 '메이지 14년(1881​)의 정변'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낵가제 도입(1885), 헌법제정(1889), 의회개설(1890)의 근대화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폐번지현이 단행된 1871년을 일본의 근대국가체제 출발점이라고 본다면, 그로부터 10년 동안 일본은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중간 시점인 1876년에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기는 하였으나 ,정한론의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분출시킨 것에 불과했다. 곧이어 터진 사쓰마의 세이나전쟁으로 조선 경략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조선에게는 이 기간 약 10년의 세월이 일본의 병탄 야욕을 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1882년 7월 임오군란으로 청국군이 한양에 상주하면서 조선의 자주성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1884년 12월 김옥균 일파의 갑신정변으로 일본이 조선에 출병할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의 북양대신 리홍장은 1885년 4월 텐진에서 '향후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어느 한쪽이 출병할 경우 이를 문서로 통보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다.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출병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조약이었으나 영토주권자인 조선은 협약에서 배제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은 이 조약이 빌미가 되어 조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와 이토 히로부미의 등장 배경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보다 20년 개항에 뒤지면서 나라의 운명이 다하게 되었습니다. 신권이 강한 조선의 패망에 대한 책임을 고종이 다 떠안하야 할까요?

유교와 성리학에 발이 묶인 조선. 조선말 개항 전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잘 활용하였다면, 아니면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하였을 때 잘 이용하였다면.....

김옥균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와의 통상을 잘 성립시켰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이 단어가 아쉽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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