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정승화가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특히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를 민주화의 영웅으로 만들려다 좌절된 세력들이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12·12를 쿠데타로 몰아가려는 정치적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었다·그러나 김영삼 정권 초기만 해도 쿠데타로 몰지는 못하고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김영삼 정권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빚어진 위기 탈출을 위해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정치보복극을 연출했고, 당시 국회와 법원은 이 반역사적 폭거에 충실한 하수인으로 봉사했다·어쨌든 그들은 12·12를 ‘반란’으로 정죄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1권·혼돈의 시대 / 제2장·[12·12_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중에서
당시 전국 총학생회장단연합회가 채택한 결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국민연합이 5월 16일 정부에 요구한 내용과 똑같았다·… 국민연합의 배후조종에 따라 학생시위가 정치권과 재야세력 그리고 학생이 연계된 본격적인 반정부 폭력투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당국이 주목한 것은 압도적 규모의 시위대 숫자가 아니라 배후세력의 핏발 선 적의敵意였다·그들이 제시한 시한이 하필이면 일본 당국이 알려준 북한의 대남 도발 날짜와 겹쳐 있었던 것이다·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5월 22일 경찰과 집회세력과의 일대 유혈 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그런 사태를 북한이 이용하려 들 경우를 상정하는 것은 악몽 그 자체였다·
---「1권·혼돈의 시대 / 제3장·[5·17_위기 수습을 위한 최 대통령의 결단] 」중에서
‘내란’으로 판정되었던 광주사태는 어느 날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되더니 어느 순간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화 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군수공장과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시민군’이 국군을 공격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그러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새로운 진술과 정황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공론화하는 길은 봉쇄되어 있는 것 같다·도대체 광주사태 때 무슨 일들이 벌어졌으며 그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잠복해 있을 뿐 정리되지 않고 있다·논란이 정리되지 않는 한 그 비극의 상처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광주사태는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인 것이다·
---「1권·혼돈의 시대 / 제4장·[5·18_신화의 자리를 차지한 역사] 」중에서
뛰어넘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을 거둔 4MD램 개발의 주역들을 모두 청와대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우리 연구진들과 기업인, 관계공무원들 모두가 자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졌다·나는 사실 처음 힘을 합쳐 4MD램을 개발하자고 강력히 권유할 때에도 속으로는 반신반의했다·그런데 어쨌든 우리는 해낸 것이다·연구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었다·나도 연구원들이 권하는 술잔을 모두 받아 마셨다·나는 “정부가 계속 지원해줄 테니 다음에는 64MD램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개발해내시오·그때는 내가 대통령이 아니겠지만 돈이 없으면 내 머리카락이라도 팔아서 한턱내겠소·”라고 했더니 참석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2권·청와대 시절 / 제5장·[과학기술의 진흥] 」중에서
이임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박정희 의장이 나를 부르시더니 군으로 돌아갈 것 없이 예편해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고 말씀하셨다·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저는 정치한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뿐만 아니라 지역에 조직도 없고, 자금도 없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며 고사했다 그러자 박 의장은 “그런 것들은 걱정할 것 없다·내가 알아서 다 도와줄 테니 출마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다시 “저는 군이 좋습니다·훌륭한 군인이 되려고 사관학교에 들어왔으니 군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박 의장은 “군인으로 있어야만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정치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고 국회의원 출마를 계속 강한 어조로 권유하시는 것이었다·
-3권·황야에 서다 / 제1장·[회상] 」중에서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랫목에 놓아둔 양재기 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고 법당에 나갔다·아무것도 모른 채 참석하는 새벽예불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영하 20도 추위에 꽁꽁 얼어 있는 법당에 들어가 앉았다·아무리 내의를 껴입어도 냉기가 사정없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새벽예불 내내 뼛속까지 얼어붙는 고통이 스며들었다·목탁소리도, 염불소리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법당에서 절을 하다 보면 추위에 무릎이 시리다가 나중에는 신경이 마비되는 듯했다·백담사 생활이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새벽예불을 마친 후 일어나질 못했다·주위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난 나는 손발 끝은 물론 내장까지 얼어버린 것 같았다·
---「3권·황야에 서다 / 제3장·[백담사에서의 769일] 」중에서
검찰로부터 받은 소송기록은 600여 명의 대상자를 조사한 총 155권 17만 장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아무리 정치재판이라고 해도 피고인이나 변호인은 재판을 받기 전에 자료를 건네받아 검토할 수 있어야 하고 수사기록을 최소 한 번은 읽어볼 수 있는 시간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그러나 우리가 5차 공판 때까지 자료를 일절 건네받지 못해 무슨 근거로 기소가 되었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재판에 임해야 했다·아무리 결론을 내려놓고 하는 정치재판이라고 하지만 공정한 재판을 한다는 모양새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3권·황야에 서다 / 제6장·[정치재판의 민낯] 」중에서
뛰어넘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을 거둔 4MD램 개발의 주역들을 모두 청와대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우리 연구진들과 기업인, 관계공무원들 모두가 자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사실 처음 힘을 합쳐 4MD램을 개발하자고 강력히 권유할 때에도 속으로는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는 해낸 것이다. 연구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연구원들이 권하는 술잔을 모두 받아 마셨다. 나는 “정부가 계속 지원해줄 테니 다음에는 64MD램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개발해내시오. 그때는 내가 대통령이 아니겠지만 돈이 없으면 내 머리카락이라도 팔아서 한턱내겠소.”라고 했더니 참석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2권. 청와대 시절 / 제5장. [과학기술의 진흥]」중에서
이임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박정희 의장이 나를 부르시더니 군으로 돌아갈 것 없이 예편해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저는 정치한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에 조직도 없고, 자금도 없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며 고사했다 그러자 박 의장은 “그런 것들은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알아서 다 도와줄 테니 출마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다시 “저는 군이 좋습니다. 훌륭한 군인이 되려고 사관학교에 들어왔으니 군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박 의장은 “군인으로 있어야만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정치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고 국회의원 출마를 계속 강한 어조로 권유하시는 것이었다.
---「3권. 황야에 서다 / 제1장. [회상] 」중에서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랫목에 놓아둔 양재기 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고 법당에 나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참석하는 새벽예불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영하 20도 추위에 꽁꽁 얼어 있는 법당에 들어가 앉았다. 아무리 내의를 껴입어도 냉기가 사정없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새벽예불 내내 뼛속까지 얼어붙는 고통이 스며들었다. 목탁소리도, 염불소리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법당에서 절을 하다 보면 추위에 무릎이 시리다가 나중에는 신경이 마비되는 듯했다. 백담사 생활이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새벽예불을 마친 후 일어나질 못했다. 주위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난 나는 손발 끝은 물론 내장까지 얼어버린 것 같았다.
---「3권. 황야에 서다 / 제3장. [백담사에서의 769일] 」중에서
검찰로부터 받은 소송기록은 600여 명의 대상자를 조사한 총 155권 17만 장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정치재판이라고 해도 피고인이나 변호인은 재판을 받기 전에 자료를 건네받아 검토할 수 있어야 하고 수사기록을 최소 한 번은 읽어볼 수 있는 시간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5차 공판 때까지 자료를 일절 건네받지 못해 무슨 근거로 기소가 되었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 재판에 임해야 했다. 아무리 결론을 내려놓고 하는 정치재판이라고 하지만 공정한 재판을 한다는 모양새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3권. 황야에 서다 / 제6장. [정치재판의 민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