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오십일, 이백오십이…….”
남자의 팔꿈치가 직각으로 꺾여 바닥으로 내려갈 때마다 보기 좋게 갈라진 남자의 구릿빛 등 근육이 꿈틀거리며 제 존재감을 나타냈다.
“하아.”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온 민준이 잘 구워진 토스트와 커피를 식탁 위에 올렸다.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신문을 넓게 펼치자 정치면 제일 위에 ‘강현석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으로 곧 취임식을 하고 청와대에 입성할 대통령에 대한 기사들이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월 25일 취임식 예정인 강현석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식 당일 영부인 이미연 여사와 함께 청와대에 입성할 예정이다. 영애인 강조국(25) 양은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직장인으로, 전대 대통령들의 경우와 다르게 미혼인 자녀로서는 이례적으로 청와대에 동반 입성을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바삭, 토스트가 입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띠리리리-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출근 준비는 잘하고 있나?]
“강조국은 누굽니까, 팀장님.”
민준이 토스트를 베어 물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가 오늘부터 비밀 경호를 하게 될 영애의 이름은 분명 강설이라고 들었다.
26세 강설. 강현석 대통령 당선인의 유일한 자녀.
강설에 대해 알려진 신상 정보는 거의 없었다. 대통령 당선인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딸의 신상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을 꺼려 했었고, 때문에 현재 그의 딸 강조국(25) 양에 대한 정보는 나이와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게 없었다.
[몇 년 전에 개명한 이름이 강설이야. 대외 극비 사항이니 말조심해. 회사 사람들은 강설 씨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니 행동 조심하고.]
‘개명이라. 굳이 개명을 하면서까지 철저히 신분을 속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홀짝 커피 한 모금이 목 뒤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경호 붙지 않습니까. 어차피 눈에 띌 텐데요.”
민준은 무심하게 신문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당선인도, 본인도 원하지 않아 눈에 띄지 않게 원거리 경호만 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그곳에 들어가는 거잖아.]
민준은 며칠 전 영애의 근거리 경호를 위해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 동으로 이사를 왔다. 앞 동과 뒤 동이 서로 가깝게 붙어 있는, 동 간 간격이 좁은 아파트이다. 민준의 아파트 뒤쪽 베란다 창문에서 시선을 조금 내리면 커튼을 치지 않은 강설의 아파트 거실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특히 어두운 밤이면 더욱 선명하게.
“설마, 저를 여기에 5년 동안 처박아두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신문을 넘기던 손이 멈칫하더니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민준은 NIS(국가정보원)의 대테러 1팀 소속이며 작년, 독일 베를린에서 납치된 인질을 무사히 구출해 돌아온 전적이 있는 최고의 정예 요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준은 그에게 밀착 경호가 임무가 주어졌을 때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한참 동안 박 팀장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었다.
[영애가 5년 안에 결혼을 하든가, 그도 아니면 경호 임무가 해제되든가. 뭐 어쨌든 그동안 둘 중에 하나는 걸리지 않겠어?]
“하나가 더 있지 않습니까.”
[뭐가?]
“영애가 경호관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을 때.”
[영애는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행동 조심해.]
박 팀장의 말에 민준이 인상을 구기며 일어섰다. 옷장 문을 열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양복들이 보였다. 잠시 후 민준은 짙은 갈색 서류가방과 차 키, 그리고 사원증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룹 Pakin 계열사 Boni의 해외 사업부, 민준이 오늘부터 근무하게 될 곳이다.
주식회사 Boni는 식음료 프랜차이즈 전문 회사로, 몇 년째 업계 1위를 놓치지 않는 탄탄한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대기업 Pakin의 계열사답게 도심 노른자 땅 한복판 위에 위풍당당 우뚝 솟아오른 Boni 사옥이 아침 햇살에 반짝 빛을 냈다.
민준은 1층 로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건물 안은 한산했고 지나칠 만큼 고요했다. 9층 유리 출입문 앞 단말기에 사원증을 인식시키고 안으로 들어가니 안쪽으로 길게 연결된 통로를 따라 각각의 부서들이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뚜벅뚜벅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가던 민준의 발걸음이 마케팅이라는 글자 근처에 가 멈추어 섰다.
마케팅팀. 경호 대상인 강설이 근무하는 부서였다. 아직 출근 시간이 30분이나 남아 있어서 그런지, 사무실엔 휑한 고요함과 함께 썰렁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민준은 길쭉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케팅팀과 마주 보고 있는 해외사업부 파티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며칠 전 인사팀 팀장의 안내를 받았던 자리를 찾아 서류가방을 올려놓은 후,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전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빠.”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여자의 구두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요 며칠 계속 저를 지켜보고 따라오는 남자 두 명이요. 제가 몽타주라도 그려 드려요?”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
인상을 찌푸리던 설은 몇 발자국 옆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 회사예요, 끊어요.”
설이 서둘러 핸드폰을 끊더니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민준의 무심한 시선이 설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설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민준에게 인사를 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한쪽 얼굴을 가리듯 내려오자 설이 오른손을 들어 뒤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 넘겼다.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미리 사진으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많이 달랐다.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 봐서 그런 건지, 그녀의 주변엔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공기가 맴돌았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혹시 새로 온 경력직 직원인가?’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머리 위로 물음표들이 둥실 떠올랐다.
“……해외사업부 김민준 대리입니다.”
중저음의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착 감겨 들어왔다. 낮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울림. 설이 시선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간 남자의 입꼬리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케팅팀 강설 주임이에요. 그런데 못 뵙던 분이신데…….”
“제가 오늘 첫 출근이라서요.”
설은 그제야 수긍했다. 그러고 보니 해외사업부에서 경력직 사원을 한 명 충원했다고 들었던 것도 같다.
“초면에 실례지만 핸드폰 한 번만 빌릴 수 있을까요? 제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남자의 말에 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 전화번호를 알려고 하는 걸까? 아니야, 어차피 전화번호 같은 건 금방 알 수 있잖아. 하지만 책상마다 개인 전화기가 놓여 있는데 왜?’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설은 마침내 민준 앞에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래도 이제 매일 얼굴을 볼 사람인데 야박하게 굴 수는 없었다.
“여기요.”
민준은 핸드폰을 받아 들며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고 설에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서 바깥 복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이 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자를 안으로 당겨 앉았다. 노트북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누르자 까만 컴퓨터 화면이 금세 파란빛으로 가득 차며 환하게 밝아졌다.
사무실 9층 복도로 나온 민준은 귀에서 핸드폰을 떼며 흘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 구석에 CCTV가 있었다.
민준이 느긋하게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핸드폰 뒷면 나사를 풀어내고 그 안에 작은 칩 하나를 밀어 넣었다. 핸드폰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데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름만큼이나 심플하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민준이 픽 미소 지었다. 설의 핸드폰은 아무런 잠금 설정도 되어 있지 않았고 바탕 화면엔 기본 앱 외에는 특별할 것 하나 깔려 있지 않았다. 그 누가 가져다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았다.
“잘 썼습니다.”
‘깜짝이야.’
업무 시작 전 이런저런 포털 기사를 검색하던 설의 눈앞에 갑자기 까만 핸드폰이 불쑥 나타났다. 설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민준이 파티션 앞에 서서 핸드폰을 쥔 오른손을 길게 내밀고 있었다.
“네.”
설은 받은 핸드폰을 옆에 두고 읽고 있던 기사에 다시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설의 앞에 서 있었다.
“여기 구내식당은 먹을 만합니까?”
설은 고개를 다시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제게 묻는 말이 맞는 듯했다. 잠깐 의아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던 설이 마침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을 만하다는 기준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대로 서서 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찮다, 이 남자.’
“또 물어볼 게 남아 있으세요?”
설의 목소리가 조금 언짢아졌다.
‘평범한 회사이다. 평범한 회사의 평범한 직원. 이곳에 대통령의 딸이라는 게 알려져서 특별히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없을 것 같은데, 날 이곳에 부러 집어넣은 이유가 뭘까.’
“강설 씨는 마케팅팀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민준의 입술이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품 홍보, 광고 쪽 일을 하고 있어요.”
별로 민준과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설은 시선을 내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열어 전화 버튼을 누르자 최근 통화 목록에 02-114라는 숫자가 보였다.
설이 고개를 들어 의아한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았다. 민준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근처에 맛있는 식당 좀 물어보려고.”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설의 시선을 피해 민준이 그제야 기대 서 있던 파티션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태연하게 맞은 통로 건너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설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멀어지는 민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