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잔소리를 해 대는 손님을 한 시간 가까이 상대하고서야 간신히 양해를 구했다.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는데,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는 ‘그럼 먼저’ 하면서 퇴근하려는 참이다.
“잠깐, 마쓰시타 씨.”
모에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미키가 다소 애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뭐죠”
“뭐죠라니. 체스트 주문할 때 색을 잘못 지정한 건 마쓰시타 씨잖아. 얼마 전에도 마터니티 드레스 사이즈 실수하더니. 좀 제대로 해.”
“네.”
다소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무시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말 알고 대답하는 거야? 이렇게 시달리는 내 입장도 생각을 좀 해 줬으면 좋겠네.”
미키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아니에요.”
“어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미키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주임님은 클레임을 처리하는 게 일이잖아요. 그래서 월급도 많이 받는 거고요. 각자 자기 담당이 있으니까, 별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순간, 할 말이 궁했다. 모에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너 말이지, 그런 생각으로 일하니까 실수가 계속되는 거라고. 너의 실수가 너뿐만 아니라 결국 회사 전체에 불필요한 지출을 야기한다는 걸 왜 모르지? 그렇게 따지고 들기 전에 일이나 좀 똑바로 해.”
마지막 말에는 어느 정도 감정이 배어 있었다. 미키가 어깨를 떨었다. 울고 있는 것이다. 겨우 이런 정도 일로 울다니. 여기는 학교 체육관 뒤가 아니다.
그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야사카 씨, 젊은 사람 너무 심하게 야단치지 마.”
목소리의 주인은 사십 대 중반의 계장이다. 앞머리가 훤히 드러나, 일을 구실로 세계 각지에서 발모제를 주문하고 있지만 효과는 전혀 없다.
“야단치다니 무슨 의미죠? 주의를 주는 건 제 일이라고요.”
모에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오오, 겁나네.”
계장이 허풍스럽게 고개를 움츠렸다. 노처녀의 히스테리라는 둥, 시대착오적인 대사를 읊조리고 있다. 더 확실하게 항의하자 싶어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계장의 번들거리는 이마를 본 순간 맥이 풀렸다. 미키에게도 더 이상 화낼 기력이 없었다.
---pp.50-52
여자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무모한 행위가 있다.
그 하나가 제모다. 귀찮고 넌더리가 나지만 이 무모한 행위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여자’라 할 수 없다고 루리코는 생각한다.
놀랍게도 세상 도처에는 성별은 여자면서 여자로 살고 있지 않은 여자가 널려 있다. 루리코는 기본적으로 남자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여자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여자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어쩌면 그리도 무심할 수 있는지.
스타킹 안에 정강이 털이 배배 꼬여 있거나 반소매 안으로 겨드랑이 털이 시커멓게 보이면 마치 성기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처럼 민망하다. 뚱뚱한데도 살을 빼려 하지 않는 여자, 못생겼는데 성형수술을 받지 않는 여자. 루리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코에 보형물을 넣었다. 미용을 위한 성형수술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많은데, 루리코는 절대 나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콧날이 오뚝해지면서 한층 자신의 얼굴이 좋아졌다. 중요한 것은 콧날이 오뚝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느냐, 그 점이다.
“무로노 씨.” 피부 관리사가 말을 걸었다.
또야, 하고 생각했다.
“기미 관리, 어떻게 하고 계세요”
“뭐, 적당히.” 아픔을 견디면서 루리코는 대답했다.
“실은 집중적으로 기미를 제거하는 미용 코스가 새로 생겼거든요. 효과가 굉장히 좋아요. 어떠세요? 한번 받아 보시죠.”
간드러지는 목소리다. 이런 식으로 걸려들게 만든다. 제모 외에도 얼굴과 종아리 라인 관리 코스에 다니고 있는데, 뭘 더 하라는 말인가.
“선착순 열 분의 손님에게 일회 무료 쿠폰을 드리고 있으니까, 꼭 해 보세요.”
일단 손을 대면 절대 안 한다고 할 수 없다. 부티크에서 옷을 다 입어 본 후에 안 사겠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다.
---pp.75-77
휴대전화가 울렸다. 가키자키였다.
“잘 있었어?”
가키자키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부드럽고 기분 좋다. 가키자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목소리의 질이 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응.”
“비가 오네.”
“이쪽은 아직이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지만.”
“이런 분위기, 굉장히 좋은데.”
“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모에는 당황한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애틋한 기분이 든다.
“지난번에 한 얘기 말인데.”
“응.”
“어떻게 할래?”
온천 얘기다. 온천에 가는 것은 상관이 없다. 가키자키와 산속 조용한 여관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모에는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시작될 것이다.
가키자키와는 이미 잠자리를 같이한 관계이니, 새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모에는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이, 분명 시작된다.
지금은 아직, 자신의 몸 절반만 가키자키를 향하고 있다. 언제든지, 가령 수염을 깎고 난 자리가 지저분하다고 느껴지면 그 자리에서 금방 몸을 돌릴 수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키자키와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시작되고 나면, 온몸으로 가키자키만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콧구멍 밖으로 슬쩍 내비치는 코털까지 사랑스럽다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지, 모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남자와 마주한 적이 오래도록 없었다.
---pp.259-260
료는 정말이지 눈에 띈다. 여자의 마음을 후리기에 너끈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그런 료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정작 료는 루리코에게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 료가 진 잔을 기울였다.
“나 같은 남자 때문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찾는 게 좋을 텐데.”
루리코가 물었다.
“내게 어울리는 남자가 어떤 남잔데”
“당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지.”
루리코는 료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이마에서 코, 그리고 턱으로 이어지는 선이 불빛을 받아 선명하게 부각된다. 료의 아름다움은 완벽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싸여 있는 몸속 모든 것까지 루리코에게는 완벽하게 느껴졌다.
“나는.”
루리코는 달콤한 베일리스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나는 여러 남자에게 보통 여자의 평생 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 좋은 추억도 많고.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충분히 사랑받았으니까.”
료가 씁쓸히 웃으면서 루리코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군.”
“경의를 표하는 거야, 나를 사랑해 준 남자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럴싸한 말이군.”
“당신이 나를 여자로 사랑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뭐 연애 감정만 당신과 나를 이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무슨 뜻이지”
“연애가 아니라,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까”
“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군.”
“나, 그렇게 눈꼴신 여자야”
료는 잠시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
---pp.32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