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자기 멋대로
바로와 대영이는 사촌이다. 엄마는 아들인 바로보다는 조카 대영이한테 신경을 엄청 쓴다. 특히 단원 평가라도 보는 날이면 시험공부는 했는지부터 문제집 푼 거 다 기억하나까지 일일이 잔소리다. 엄마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바로는 늘 올백을 맞지만, 대영이는 평균 50점이나 되면 다행일 정도. 이렇게 실력이 형편없는 대영이지만……, 녀석은 꿈 한번 크다!
지난번 단원 평가 때처럼 이번에도 국어 스물다섯 문제, 사회 스물다섯 문제이다. 객관식 스무 문제, 주관식 다섯 문제인데, 주관식이 까다로운 편이다.
“시간 다 됐으니까 뒤에서부터 걷어 와라.”
그때 녀석이 투정을 부리듯 소리쳤다. 녀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잘 낸다.
“아직 다 못 했어요! 배우지도 않은 게 나왔어요!”
“이 녀석아! 억지 부리지 말고 빨리 내기나 해.”
녀석은 시험지를 내면서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시험지에 기도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제발 100점 받게 해 주세요. 100점, 100점 꼭 받게 해 주세요.”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100점 근처에도 못 가는 녀석의 소원은 늘 100점이다. (23~25쪽)
엄마 아들 여기 있어요!
60점, 76점, 64점, 56점. 이번 시험에서 대영이는 평소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 공부방 선생님인 바로 엄마와 미소 선생님은 기뻐하며 잘했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대영이는 선생님들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나머지 눈물을 쏟는다. 자기는 머리가 나빠서 절대로 100점을 맞을 수 없을 거라며……. 그러자 선생님들은 대영이가 한 과목이라도 100점을 맞으면 ‘백점 파티’를 열어 주겠다고 한다. 바로는 옆에서 한마디도 못 하고 속이 냄비처럼 부글거린다. 수없이 100점을 받아 왔어도, 바로한테는 한 번도 백점 파티를 해 준 일이 없는 엄마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좋아, 우리 대영이가 한 과목이라도 100점 받아 오면 근사하게 파티 한 번 하자.”
엄마가 ‘우리 대영이’라고 했다. 말썽쟁이 고집불통 녀석이 마치 엄마 아들이라도 되는 것 같다. 외숙모가 먼 여행을 떠난 다음부터, 녀석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오고부터, 엄마는 나보다 대영이가 우선이다. 도대체 누가 엄마 아들인지, 조카인지 모르겠다.
‘엄마 아들은 100점 받았다고요! 1학년 때부터 매번 100점을 받아 오는데도 파티 한 번 해 주지 않았잖아요!’
내 속만 바싹바싹 타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얘기가 목구멍까지 차 있어도, 나는 늘 이해하고 꾹꾹 참아야만 한다.
(중략)
“뭘 먹을까? 피자 파티할까? 케이크 파티할까? 떡볶이 파티할까?”
누가 보면 올백이라도 받은 줄 알겠다. 녀석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큰 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다.
‘녀석이 100점을 받기나 할 것 같으세요? 절대 그럴 일 없을걸요?’
녀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엄마가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물었다.
“바로야, 오늘도 대영이가 친구랑 싸웠다면서?”
(중략)
“바로야, 대영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얘기 좀 해 주고, 잘 관찰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녀석이 곤충도 아니고 잘 관찰하라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엄마가 넋두리까지 해 댔다.
“바로야, 엄마가 대영이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허구한 날 친구들하고 싸웠다는 얘기만 들리니까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녀석 때문에 속이 상하는 것을 왜 나한테 말하는지 모르겠다. 엄마만 힘든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녀석 때문에 얼마나 귀찮고 힘든지 아무도 모른다.
외숙모가 죽고 나서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엄마도, 이모도, 삼촌도, 선생님들도……, 모두 녀석에 관한 거라면 다 나에게 묻는다. 모두 엄마 없는 녀석만 걱정해 주고, 녀석에게 엄마를 빼앗긴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8~53쪽)
녀석을 위한 백점 파티
대영이가 100점을 받았다! 하필이면 바로가 처음으로 올백을 맞지 못한 날인데 말이다! 질투심이 폭발한 바로는 대영이 몰래 대영이의 시험지를 훔치고 만다. 대영이의 시험지를 찢어 버릴까 고민하던 바로는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던 대영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자신이 치사하고 한심하게 느껴진 바로는 아무도 없는 교실로 돌아가 시험지를 대영이의 서랍 속에 넣어 두고 공부방으로 돌아간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대영이의 백점 소식에 들떠 있다.
“대영아, 잘했다. 잘했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오늘 같은 날이 있구나. 하늘에 있는 너희 엄마도 진짜 기뻐하겠어.”
엄마는 죽은 외숙모까지 들먹거렸다. 오늘만큼은 녀석의 날이다. 단원 평가 한 과목 100점 받았을 뿐인데, 누가 보면 전교 1등이라도 한 줄 알겠다. 전교 1등보다 더 좋은 건 뭐 없나? 그래, 서울대학교에 철썩 합격이라도 한 것 같다. 아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것 같다.
(중략)
녀석이 이를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그 얼굴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엄마가 재촉했다.
“시험지 꺼내 봐! 대영이 100점 받은 것 좀 보자.”
녀석은 황파일을 찾아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엄마가 물었다.
“안 갖고 온 거야? 오늘 같은 날 두고 오면 안 되지.”
“어? 아니에요. 분명히 넣었단 말이에요.”
나는 슬쩍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옆에서 눈치 없는 1학년 민아가 물었다.
“바로 오빠도 100점이지? 오빠는 항상 100점이잖아.”
그러자 엄마가 내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내 보고는 말했다.
“바로, 넌 왜 96점이야? 어이없게 틀렸네. 소수점은 반드시 찍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
엄마에게 내가 100점 받는 일은 매일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거나 다름없나 보다. 그렇게 묻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왜 96점이냐고 물으면 그걸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엄마가 언제 나한테 말해 줬는데? 대영이한테 얘기한 거잖아.”
평소에 가만히 있던 내가 따져 묻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때 녀석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넌 또 왜 우는데?”
엄마의 물음에 녀석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어디 뒀는지 기억이 안 나요. 밖에 나가 한번 찾아볼게요. 아까 공원에서 화장실 간다고 가방을 벗어 놨는데, 거기서 빠졌을 수도 있어요.” (72~75쪽)
내 걱정만 하는 녀석
잃어버린 시험지를 찾으러 나갔던 대영이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가고, 잔뜩 신경이 예민해진 바로도 급성 위경련으로 입원하게 된다. 다행히 대영이는 몇 주간 깁스하면 된다는 진단을 받고 바로를 병문안하러 온다. 바로는 외삼촌에게서 대영이가 늘 많이 의지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다. 엄마는 바로에게 그동안 많이 힘들었냐고 묻는다. 바로는 그동안 감춰 왔던 속마음을 고백하고 대영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외숙모가 죽고 엄마는 늘 엄마의 힘든 점만 말했다. 내 얘기를, 아빠 얘기를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아니면 말하기 힘들 것 같았다.
“엄마만 힘든 게 아니야. 대영이랑 외삼촌만 힘든 게 아니라고. 엄마를 빼앗긴 나도, 아빠도 힘들다고. 외숙모 죽고 나서 나는 엄마 눈물 흘리는 모습만 봤어. 그래서 엄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100점을 받아 왔는데, 엄마는 칭찬 한 번 해 주지 않았잖아. 엄마는 언제나 대영이 먼저, 대영이 걱정뿐이었어. 나는 완전 찬밥이었다고. 누가 엄마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우리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내가 대영이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를 거야. 껌딱지처럼 붙어 다녀서 나는 친구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고.”
“그래그래, 우리 아들…….”
엄마가 내 눈물을 닦아 주더니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참, 대영이 시험지 말이야. 대영이 책상 서랍에 있다고 하더라. 담임 선생님이 널 봤다고 하셔. 부를까 하다가 그냥 두셨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엄마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불 밖으로 비집고 나온 내 손을 엄마가 슬며시 잡아 주었다.
“선생님 말씀 듣고 엄마도 짐작했어. 그리고 잠들어 있는 우리 아들 보면서, 엄마도 반성 많이 했어.” (90~92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