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을 위한 저항이라 믿어왔던 것이 약자들의 배제였다면, 지배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한 저항의 날갯짓이라 믿어 왔던 것이 지배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흙투성이의 착각이었다면, 그래서 이제는 추락할 일만 남았다면 어떨까? 물론 낙엽처럼 아플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퍼덕거려야만 한다. 아름답게 떨어지기 위해.” - 저자의 말
약자들이 추하게 보이는 시대?
2016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 중의 하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메갈)’의 활동을 둘러싼 문제이다. 메갈이 여성혐오를 그대로 남성에게 반사하여 적용하는 ‘미러링’을 운동 전략으로 삼으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을 거치며 생겨난 가장 심각한 결과는 약자들의 저항이 추하게 보이는 현상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약자들은 메갈을 통과하며 남녀 성별에 따라 반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제 남성 약자들과 여성 약자들은 서로를 지켜 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쪽 약자들의 저항은 다른 쪽 약자들의 눈에 추하게 보일 뿐이다.
저자는 메갈 문제에서 오늘날 저항이 처한 위기의 징후를 발견한다. 오늘날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은 아름답게 보이는 약자들만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이러한 약자들은 ‘우리’이다. ‘우리’가 아닌 다른 약자들은 만일 우리로부터 존중받고자 한다면 (도덕적으로) 아름다워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약자들이 추하게 보이는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결국 ‘우리’의 저항은 약자들인 ‘우리’를 배제한다.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 저항은 미학화되었고, 그 결과 저항은 그 자체로 배제의 폭력이 되었다. 저항의 위기! 참된 저항은 이제 불가능한 것인가? 저자는 메갈 문제를 오늘날 저항이 처한 위기를 가리키는 지표로 삼아 저항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려 시도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구조주의와 미학을 왕래하며 진단과 처방을 모색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배제
이미 전작 『웃지 마, 니들 얘기야』(2016)에서 푸코, 알튀세르 등의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관점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약자 문제를 분석한 바 있는 저자는 메갈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구조주의의 ‘상징적 질서’ 개념으로 배제의 문제에 접근한다. 약자들에게 행해지는 배제는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상징적 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암묵적 배제’이다. 명시적 배제는 눈에 보이는 배제이며, 따라서 배제하는 자도 배제 받는 자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배제이다. 이와 달리 암묵적 배제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잘 인식될 수 없다. 문제는 비가시적인 암묵적 배제가 가시적인 명시적 배제보다 더 위협적이고, 더 치명적인 배제라는 사실에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저항은 명시적 배제에만 대항하느라 가장 근원적인 구조적 문제인 암묵적 배제를 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이들은 자신들로 모르게 암묵적 배제를 행하고 있다. 결국 저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억압이 되었다.
에이콘과 판타스마
메갈의 미러링은 어떤 저항이었을까? 저자는 플라톤의 미학 개념인 ‘에이콘’과 ‘판타스마’를 통해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플라톤은 모방에서의 예술을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하나는 ‘에이콘’이고 하나는 ‘판타스마’이다. 에이콘은 실재한 것을 닮은 꼴로 재생한 것, 원본에 충실한 모방으로서의 복사물을 가리킨다면 판타스마는 원본에 충실하지 않은 모방, 일종의 거짓을 말한다. 원본을 모방하는 에이콘은 자기 자신의 바깥을 가리키지만, 판타스마는 오직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바깥의 실재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지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이콘과 판타스마를 우상숭배 및 이데올로기 문제와 연결하면서 저 두 개념을 저항 문제를 분석하기 위한 관점으로 변용시킨다. 즉 에이콘적 저항은 저항하는 이들의 바깥을 가리키는 참된 저항인 반면, 판타스마적 저항은 저항하는 이들 자신들만을 가리키면서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되는 가짜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메갈의 저항 또한 기존 현실의 지배구조에 순응하는 판타스마로 귀결되었다고 진단한다. 메갈의 미러링이 기존의 지배 구조를 지시하면서 여성 문제를 환기시키는 대신, 반대 세력에 의해 부풀려지고 과장되면서 메갈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침을 뱉는 데 열중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자. 판타스마는 메갈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저항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모든 저항이 판타스마화하면서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미학의 윤리화라는 반전
저자는 구조주의적 분석과 미학적 논의를 통해서 메갈과 메갈을 옹호한 페미니스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결론에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분석에 대한 해체를 시도한다. 책 전반을 통해서 자신이 일종의 암묵적 배제를 행해 왔음을 넌지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저자는 메갈을 판타스마로 ‘보았다’. 만약 약자들이 내 눈에 추하게 보인다면, 그 이유는 내가 약자들이라는 현상을 그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상에는 ‘무관심성’이 개입하며, 바로 무관심성을 통해서 나는 약자들의 고통과 그 고통의 표현을 불쾌하게 느낀다. 이때 나는 판타스마에 갇혀 있는 셈이다. 결국 약자들의 저항을 에이콘으로 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에이콘적 감상자여야만 한다.
만일 타인이 내 눈에 추하게 나타난다면, 그 이유는 내 눈이 배제하는 질서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에이콘적으로 약자를 보려면,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눈먼 사랑’,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은 상징적 질서의 도덕에 거스르는 윤리, 즉 ‘미친 윤리’이다. 상식의 도덕 속에서 가장 추하게 보이는 약자들을 추하게 보는 것을 거부하기! 미학의 정치화가 완료되고, 정치의 유미화가 고착된 오늘날, ‘우리’의 정치에 반대하는 약자들이 추하게 나타나는 오늘날, 저항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미학의 윤리화’이다. 미친 윤리, 눈먼 사랑, 즉 ‘눈먼 예술’로서의 약자들의 콜라주.
3. 저자 소개……장의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레비나스에 관한 연구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좌파는 어디 있었는가? ― 메르스와 탈-이데올로기적 좌파의 가능성』, 『웃지 마, 니들 얘기야 ― 잊힌 룸펜 흙수저와 문화자본가로 추락한 좌파』, 『종교 속의 철학, 철학 속의 종교』(공저),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 네오르네상스를 위하여. 1』(공저),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 트랜스-휴먼과 탈-종교 시대의 대화 신학』(공저) 등이 있다. 현재 대안연구공동체, 철학 아카데미, 이문회우 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