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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반역자

: 권위와 권력에 도전해 역사를 바꾼 사람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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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3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42쪽 | 404g | 153*224*20mm
ISBN13 9788971843864
ISBN10 897184386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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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아라이 도시아키(荒井利明)
1947년 이시가와(石川)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 문화대혁명을 보며 중국에 매력을 느껴 자연계에서 인문계로 전과한 뒤, 중국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후 요미우리 신문사에 입사해 1980년부터 1984년까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두 번에 걸쳐 베이징 특파원을 지내면서 중국통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최근까지 활동하는, ‘베이징의 봄’과 톈안먼사건의 주역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를 시도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미국과 중국을 드나들었다.
≪중국의 희망 - 싸우는 손오공들≫, ≪장쩌민 정권의 행방≫, ≪변모하는 중국 외교 - 경제 중시의 세계 전략≫ 등 주로 중국 관련 책들을 펴냈으며, 그 외에 런던 특파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영국 왕실과 영국인≫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는 논설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역자 양억관
1956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아시아대학 경제학부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남자의 후반생》, 《봄의 오르간》, 《포플러의 가을》, 《항우와 유방》,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 최후의 13일》, 《냉정과 열정 사이》,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등이 있다.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마오쩌둥(毛澤東) - 공산당을 파괴한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쩌둥은 일생 동안 두 가지 혁명을 이끌었다. 하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가져다준 중국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1966년부터 10년간 계속되다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난 문화대혁명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어째서 공산당과 싸웠을까? 그 당시 마오쩌둥은 당 주석이라는 최고 직위에 있었지만, 당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마오쩌둥 자신이 제창한 대약진 정책이 실패로 끝나고 후계자로 지목했던 류사오치(劉少奇)가 그를 대신해 당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흐루시초프가 이끄는 소련의 수정주의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즉 그 당시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며 소련에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필요 없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는 승리를 거두어 소련 사회의 단결은 확고하다. 그 결과 노동자 계급의 공산당은 소비에트 인민의 전위로서 전 인민의 당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존재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당 전체의 견해로 만들어가면서,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류사오치를 숙청했다. 그의 이러한 움직임은 홍위병을 필두로 한 마오쩌둥 개인 숭배와 연결되었고, 이어 문화대혁명으로 발전해 마침내 마오쩌둥의 권위를 다시 세워주기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이 죽고 세월이 흘러 1981년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은 문화대혁명을 ‘내란’으로 평가하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지만, 마오쩌둥의 새로운 ‘반역’ 문화대혁명이 ‘사람들의 혼을 흔드는 혁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외 이 책에 소개된 반역자들>
사마천(司馬遷) - 궁형의 수치를 이겨낸 중국 최고의 역사가
왕망(王莽) - 한 왕조를 찬탈한 유교 정치가
안녹산(安祿山) - 양귀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신자
홍수전(洪秀全) - 지상 천국을 세우려 했던 객가 청년
담사동(譚嗣同) - 망명보다 죽음을 선택한 변법 운동가
장쉐량(張學良) - 장제스를 감금한 청년 장군
후펑(胡風) - 권력에 굴복하지 않은 문학가
펑더화이(彭德懷) - 마오쩌둥을 비판하다 실각한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한 후계자
왕루오수(王若水) - 소외를 논하다 제명당한 이론가
진승(陣勝)과 오광(吳廣) - 진 제국을 무너뜨린 최초의 농민 반역자
진나라의 어느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진승은 병사로 징발되어 뤄양으로 떠난다. 그런데 그의 부대는 큰 비로 길이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위기에 처한다. 그 당시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정해진 날까지 주둔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승은 어차피 죽을 바에는 크게 한번 붙어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동료인 오광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마침 오광도 그의 의견에 동의해 둘은 자신들을, 그 당시 백성들이 지지하던 시황제의 장남인 부소(扶蘇)와 초나라 장군 항연(項燕)으로 꾸며 반란의 깃발을 드높인다. 사실 부소와 항연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진승과 오광의 연기는 성공할 수 있었다.
두 반역자는 초나라의 재건을 외치면서 진나라 군사를 무찌르는 한편, 민중의 추대를 받아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승세도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결국 오광과 진승 모두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들이 죽는 순간 그들의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들의 반란을 계기로 곳곳에서 진 제국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끝까지 살아남은 유방이 새로운 왕조 한(漢)을 세웠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중국 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에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진승과 오광의 농민 반란의 계보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

해서(海瑞) - 죽음을 각오하고 황제를 비판한 청백리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명나라 때의 관리 해서는 서른이 넘어 과거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정도로 만학이었다. 그나마도 고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진사(進士)’ 자격은 끝내 얻지 못했다. 마흔이 넘어 푸젠성 난핑현의 교육 책임자가 된 해서는 검소한 생활 태도와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세로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4년 뒤 저장성 순안현의 총책임자 지현으로 승진한 그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악습 철폐에 나섰다. 그런 모습은 다음 임지인 흥국현에서도 변함없었고, 해서의 행적은 중앙에까지 알려져 그는 중앙 관직인 호부주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해서는 황제인 가정제(嘉靖帝)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감옥에 갇히고 만다. 가정제가 즉위 초기의 치세에 비해 도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정무를 소홀히 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 황제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폐하가 20여 년이나 정무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기강이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도사들에게 작위를 남발하고, 공적이 없는데도 녹봉을 주어 천하의 충신들을 멀어지게 했습니다. 또 신하를 의심하고 비방하고 죽임으로써 군신의 예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군주의 길은 혼란에 빠졌으며, 신하는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위기가 아닙니까.” ― 본문(p.76~77) 중에서

이 상소문을 보고 가정제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다행히 재상 서계(徐階)의 도움과 미리 관을 준비해두고 상소를 올린 그의 충절 때문에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가정제가 세상을 떠난 뒤 풀려나 응천 순무가 된 해서는 이번에는 지방의 권력자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농민의 토지를 돌려주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지방 권력자의 중심 인물이 바로 서계였는데, 해서는 사적인 감정과 은혜를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않고 결국 토지를 회수했다.
이처럼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해서는 먼 훗날인 1960년대에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추근(秋瑾) - 혁명을 위해 죽음을 서두른 여성 테러리스트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이 좌절되고 급기야 청나라를 타도하자는 극단적인 혁명 운동이 중국 대륙을 흔들던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서도 〈자객 열전〉을 특히 좋아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자립에 대해 깊이 생각할 정도로 진보적이고 대담한 성격을 가졌던 추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는 청일전쟁에서 조국 중국이 패한 후 남편의 반대도 무릅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청나라 타도를 지향하는 비밀 결사 단체인 ‘삼합회(三合會)‘에 들어가 사격 훈련을 받고, 폭탄 제조법을 배우는 등 혁명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다.
그 뒤 청나라의 부탁을 받은 일본이 유학생들에게 제재를 가하자 추근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귀국 후 지역 여학교 교사, 여성 잡지 창간, 사범학교 교장 등의 일을 하며 다시 혁명의 열의를 불태운다. 특히 그녀는 대통사범학교를 혁명 예비군 양성소로 삼고 절친한 동료 서석린(徐錫鱗)과 함께 봉기를 준비한다. 그러나 서석린의 봉기는 불발로 끝나고 추근 역시 청나라 정부군에 잡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처형당하고 만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간단 말이냐. 혁명은 피를 흘려야 비로소 성공하는 것이다. 내가 단두대에 오르면 혁명이 5년은 빨라질 것이다.” ― 본문(p.130) 중에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을 혁명의 제단에 바친 그녀의 용기와 반역의 열정은 아직까지도 중국인의 가슴에 남아 있다.

쑨원(孫文) - 한 번도 봉기에 성공하지 못한 영원한 혁명가
쑨원은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당하고 2년 뒤인 1868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객가 출신이었는데, 태평천국운동에 객가 출신들이 많이 참여한 만큼 그는 태평천국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열한 살 때 하와이에 있는 형을 찾아가 그곳에서 근대 서구 사회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열여섯 살 때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홍콩에서 의학을 배워 의사가 되었지만, 그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에 이어 일본과의 전쟁에도 희망이 없던 조국 청나라를 보고, 의사로서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는 혁명가로서 병든 조국을 구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후 청나라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한 뒤, 광저우에서 무장 봉기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이 누설돼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평생 실패를 거듭했는데, 이것이 그 실패의 시작이었다.
이 일로 쑨원은 현상 수배범이 되어 홍콩과 하와이, 미국, 영국을 떠돌며 화교들에게 혁명 사상을 고취하고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삼민주의’를 완성하는 한편,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여 만주족 정부를 무너뜨리고 공화제의 한족 국가를 수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때 중국 남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무장 봉기를 감행했는데, 열 번에 이르는 봉기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12년에는 난징에서 임시 대통령에 취임해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 위해 그 당시 청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위안스카이와 타협해 그에게 임시 대통령 자리를 넘겼다. 그러나 공화제에 별 흥미가 없던 위안스카이는 공화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그 때문에 쑨원은 일본으로 도피해야 했다.
그 후 반체제 혁명으로 위안스카이는 황제 자리에서 결국 물러났고, 1917년 중국 남부 군벌의 지지를 받은 쑨원은 광둥군 정부를 만들어 베이징의 군벌 정부에 대항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상황이 불리해져 그는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이렇게 계속 실패를 거듭한 쑨원은 비록 일생 동안 한 번도 봉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를 영원한 혁명가로 기억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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