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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눈동자

갈색 눈동자

진선유 저 | 눈과마음 | 2003년 09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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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3년 09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85쪽 | 513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57511152
ISBN10 895751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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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회장님의 유언입니다.”
닉은 변호사 밥이 건네주는 유언장을 받아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루는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 그와 더불어 회의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온화하던 맑은 피부색이 짧은 순간 붉게 타오르다 진정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냉정함을 잃어본 적이 없었는데, 굳어져 당혹감이 역력히 서린 얼굴이란 신선함을 안겨줄 정도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밥은 그가 몹시 당황했음을 꿰뚫어 보았다. 밥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닉은 회의실 안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듯 빙 둘러보았다. 모두 닉과 마찬가지로 스티븐슨 회장이 최종적으로 남긴 수정된 유언 내용에 어이가 없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밥을 제외하고. 밥은 닉이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재빨리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서 유언 내용을 마저 발표했다.
“그리고 이것이 유진 양이 살고 있는 주소입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몇 가지 첨부자료도 조사해서 함께 넣어두었습니다.”
닉은 아연실색했다.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회장님을 위해 일하면서 돌아온 대가가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생겨먹은지도 모르는 버려지다시피 한 핏줄 때문에…….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식을 잃어버리고 난 뒤 아들 자리를 대신 메꾸어 줌과 동시에 유능한 경영 파트너로 소임을 다해 온 닉이 차기 사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그룹 내 공공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었다. 닉 자신조차도.
결국 아무리 유능하고 높은 신임을 쌓아도 혈육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인가. 그는 이 순간 배신과도 같은 스티븐슨 회장의 유언장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겨우 스무 살짜리 동양 계집 때문에…….”
저도 모르는 상스런 말이 튀어 나갔다. 긴 회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니콜라스 데이비드 씨, 수락하시겠습니까?”
밥이 그의 대답을 종용했다.
닉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가 친척들과 현재로선 허울 좋은 명분뿐이긴 해도 유일한 직계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회장의 둘째 부인 로사, 그리고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딸 린다, 마지막으로 변호사 밥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고 나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엔 분노와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수락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길바닥에 나가 구걸이라도 해야 할 팔자가 아닙니까? 안 그래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과연 회장님답다는 말밖엔 달리 떠오를 것이 없군요. 후후후…….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들 나오세요.”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몸에선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회의실을 벗어나자마자 닉은 속에 담아두었던 울분을 가감 없이 토해 낸다. 회의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샘과 랜디는 닉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발소리조차 죽이며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로버트, 회사를 지키기 위해 머리 꽤나 쓰셨군. 손녀딸과 결혼하지 않으면 지분의 0.1%도 줄 수 없다? 하하하! 그것도 있는 줄도 몰랐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양 피가 섞인 손녀딸을 위해? 정말 이건 지독한 코메디야! 하하하!”
앞서 걸어가던 닉이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더니 차 문밖에 멀뚱히 서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샘과 랜디에게는 차에 오를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시동을 건다.
“직접 운전할 거야.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연락할 때까지 어디 가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어.”
“네에…… 그러겠습니다. 대장, 운전 조심하세요.”
“너희들조차 비웃는 거야? 마치 사고나란 소리 같군.”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닉의 보디가드인 샘과 랜디는 양손을 좌우로 흔들며 과장된 몸짓으로 부정했다. 둘을 보는 그들 보스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젠장! 꼴좋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닉의 말에 또다시 욕설이 배어 나온다. 지금 보스의 심정이 어떠리란 걸 훤히 간파하고 있는 샘과 랜디로선 묵묵히 그의 신경질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닉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리고 바라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닉은 유진에 관한 기록을 한 번 쭉 훑어보고는 더욱 답답해졌다. 그는 자료서류를 보조석 의자에 아무렇게 집어던지곤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내렸다.

『한유진. 한국 나이 20세. 현재 서울 평창동 숙부 집에 거주. 20년 전 교통사고로 부친 사망. 같은 날 모친 분만 중 사망』

너도 억세게 재수 없는 인생이군. 날 때부터 고아라니…… 안 그래?
질주를 하듯 그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아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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