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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관한 아포리즘

조연호 | 난다 | 2017년 04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0 리뷰 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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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4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00쪽 | 390g | 138*210*20mm
ISBN13 9791196075101
ISBN10 119607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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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조연호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암흑향』 『농경시』 『천문』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 산문집 『행복한 난청』을 출간했다. 현대시작품상, 현대시학작품상, 시와표현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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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고통을 앓기 때문에 죽음을 누리는 자이다. 신을 누렸던 고대의 시인들이 영광과 찬양을 새로운 수단이나 착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만큼 그들 시인에게는 죽음이 일상만큼 충만했다. 따라서 운명, 공포, 굴욕, 전쟁과 같은 생의 잔인성은 오히려 적극적 선택의 도구로서 시인의 노래에 남게 된다. ‘인간의 발견’이라는 주목할 만한 야만성의 증가가 기존의 야만성을 뒤덮은 르네상스적 빛 속에서 인간은 그때까지 자기 생 전체를 통해 홀로 울려퍼졌던 찬미가를 하나의 경연대회로 탈바꿈시켰고, 그 시상대에 올라 시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한다. 시인이 고통스러운 것은 시와 자신이 분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의 목소리가 더이상 이전처럼 자신에게 무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이상 찬양과 영광의 의지가 아니고, 찬양과 영광에 의한 의지일 뿐이다.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시인이라는 특수한 존재됨과 멀어져야 한다. 운명을 잃은 자가 오히려 너무나도 큰 낙관에 젖어, 종말에 대해 일체의 견고성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질병은 죽음을 모방할 뿐 죽음을 누리게 하지는 않는다. ---「시라는 상실」중에서

어떤 시집을 읽고 그 시편들이 전해준바, 시인이 가진 삶의 올바름 같은 것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나는 자신을 새롭게 관성화한 느낌,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운명을 받아들일 때 시는 그 운명을 저주하며 운명에 묶인 한 인간을 격하와 무례로 살아가게 한다. 나의 치욕을 남들이 찾아준 게 아니라 내가 찾을 수 있게 되는 그러한 자족적 기쁨 속에, 시는 자신이 오래전 저술했고 독해했던 빛바랜 문자의 기억을 다시금 복원해야 한다. 그 문자가 말하는 바는 곧, 운명은 불편, 불쾌를 요구하며, 자기 바깥과 불협하고 있으며, 그럴 때에만 운명이 될 수 있는 역설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를 통해 스스로를 말할 때의 우리는 사실상 의인화되어야 하고,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형태의 무엇으로 이탈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 인간은 문자에 의해 여전히 설명될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시는 언어 속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침묵이 아니다. 더 입을 열어 말해야 하고, 더 삶의 차륜에 깔려 울부짖어야 하고, 더 만월滿月인 채로 어둠에 채워져야 한다. 비우는 것도 신비로운 것이지만 채우는 것도 신비로운 것이다. 시가 운명에게 퍼붓는 저주는 인간을 인간 그 자체에서 벗어나 고통을 음악으로, 피곤을 노래로 만들며, 죽음 속에서조차 다시 도래할 역경과 고역을 기원하는 헌주獻奏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시라는 상실」중에서
서문을 대신하는 예비 메모들

이성이 잃어버린 영역을 복원하는 작업이 시를 쓴다는 것이고, 본성이 너무 많이 획득한 영역을 다시 인간에게 나눠주는 행위가 시를 읽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의 시는 장르라기보다는 하나의 부피이고, 부피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질료를 그 원인인 인간에게서 직접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극복자이자 극복되는 자이고, 병이자 치료이다. 어떤 영역에서건 시는 자연의 견해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다. 인간 안에는 자연의 한 조각으로서의 인간도 존재하지만 당위의 조각들 역시 무수히 존재한다는 전제로써만 그것은 유기체로서의 인간 전체에 토대를 둘 수 있다.
오늘날 시에 대한 인식은 독자 스스로가 자신의 피곤함을 차단함으로써 아주 간단히 복잡한 시들에 대한 공격에 성공하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공격들 중 가장 전폭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시의 통증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근원적 통증에 대해서까지 감행되는 무차별적 공격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렵다, 쉽다라는 이해의 차원에서 아름답다, 추하다라는 가치의 차원으로 옮겨가지 않는 예술의 진정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시에 주어지는 자극을 단순화하여 외부와 내부로 나눠본다면 이 야만의 상황을 좀더 간략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가 내부와 대척되는 바깥이라고 전제할 때 외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내부에서 참조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내부는 외부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내부가 외부에 의해 참조된다는 것은 외부가 그 자체를 참조하는 것으로밖에 가능하지 않다. 그런 근원적 단절이 내외에 있는데, 외부와 내부는, 즉 실재로서의 경험과 인식으로서의 체험은, 오히려 서로를 참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시늉으로써 시적 화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가 인식을 참조하고 인식이 실재를 참조하는 등방적 행위라는 시늉을 통해서 말이다. 대체로 나는 이런 허구적인 것을 시적인 것이라고 부르기에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시의 형상은 실재와 인식이 서로 반조하는 거울상이고, 거울상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보정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자체적 거리감이 하나의 선형線型에 놓인 서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은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구축적이고 분할적인 것이기도 하다. 어린 날의 언어가 훗날의 언어보다 후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면, 주어 각자는 스스로에게 누적된 의미를 넘어서는 종합적 판단을 요구할 것이다. 그것들 자체가 틈새이며, 그 틈새는 전과 후를 인과로 묶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유해질 것이다. 시들 간에는 그런 교정과 분할이 있다.

윤리학이 끝나는 곳에서 정치학이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예가 그렇듯, 시 역시 언제나 시 전반에 대한 사유가 끝나는 지점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말하여진 것은 또한 시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는 무한히 자율적이거나 단독적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성상의 파토스도 자신의 역사성으로부터 무한히 멀리 있는 것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에서의 상황은 자신의 역사, 즉 시적 상황이 고려되는 한 그 불확실성조차도 전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무늬를 찾는 일이 운문에서 일어나고 나면 그후엔 무늬에서 형식을 찾기 마련이고, 그렇게 찾아낸 무늬의 규칙들은 운문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이미지와 형식의 문제가 대략 그러한 모습일 텐데, 그런 일은 충분히 경이롭다. 그런 일이 경이로운 이유는 집 나간 탕자의 귀환이 그 자체로 기다리는 식구들에게는 큰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선물이기 위해 선물에 대한 기대감을 최대한 좌절시키는 일이 문학에서는 놀라울 만큼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만약 어떤 작품이 특정 형식을 만들었거나 차용했거나 참조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규칙성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작품은 현실적이다. 작가 자신에게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작품 내에서 사려된 것으로 나타나는 예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이나 ‘환상’이라 부르는 문학의 속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르나 구분 자체가 이미 그 구조 안에서 현실이라 불리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는 현실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상이나 환상 같은 시의 비현실성도 현실적인 것이다. 더 광범하게는 구분되는 것 자체가 현실이다. 산문과 운문은 구분되어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간에는 현실적인 어떤 차이점도 없다. 그런 맥락에서 산문 형식이 운문 형식보다 더 현실로의 소급을 주장하고 있다고는 믿기 어려운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시에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정도의 선이 언급되어야만 가능한 형식이 내재하며 그것이 우리의 도덕적 의향을 무화시키는 정서로 기능하도록 자기 자신의 특징, 즉 순수한 의미에서 지칭물의 태도로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그 미美로, 사람들에게 결백을 묻고 종국적으로 선이 정당화되는 그 미의 확립에 대해 개인 각자가 소멸하는 육체성을 경험하는, 약소하지만 그것 없이는 다른 층위로 상승할 수 없는 그런 추측으로만 가능한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시라는 형식적 시도가 감정이라는 물리적 수단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그것의 중재된 형태를 얻는 것은 결코 상이함, 대립에서가 아니다. 신의 진노 아래 놓인 인간의 숙명처럼 자신의 죗값을 외부의 형벌로 치러야 했던 그러한 형식의 상징이 우리에게 유일하며 우연하고 환원 불가능한 문법으로 이해되는 것은, 사물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형식 안에 시가 실패해야 할 심도深度의 모든 것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시의 악에 관한 이야기다.

시의 형태를 말함에 있어 한문이라는 독특한 언어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꽤 적절한 비유라는 견해를 덧붙이고 싶다. 한자의 기본은 부수다. 부수로부터 글자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하나의 한자는 부수 자체이기도 하고 부수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그런데 글자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부수들 역시 의미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었을 때, 부분의 의미는 전체의 의미에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기도 한다. 의미의 분절과 회절과 단절이 한 글자의 탄생에 동등하게 기여하는 것이다. 그 절折들에 대해 관찰자가 도출할 수 있는 규칙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예외의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자는 전체가 이질적인 부분으로 가득찬 경우조차 부분과 전체의 결합이다. 시의 형태를 한자의 비유와 대조하면 이렇다. 시에서의 형태란 쌓아올린 규칙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형태 자체의 모순은 그것이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전체로든 부분으로든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형태라는 표현을, 나아가 시형詩形이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연결 고리들이 붕괴된 것을 지칭하여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형태로 접근할 때는 그것이 이미 완결된 것으로서 존재해야 하고 더불어 그것이 하나의 의미망으로 얽혀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존재한다. 그럴 경우 시의 행, 연과 같은 형태에 대한 연결 고리 인식은 오히려 속박에 가까운 것이 된다. 나는 시의 형상을 한자의 예처럼 부수-글자, 부분-전체의 관계로 이해하고 싶다. 더욱이 시라는 전체를 그 자체와 무관한 부수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럴 경우에 글자 하나를 파자破字하여 다양하게 읽는 방식이 한자에서 가능한 것처럼 하나의 시 안에서 역시 행과 행, 행과 연, 연과 연, 이미지와 의미, 의미와 의미 등 그것이 어떠한 임의적 관계 조합이든 전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요소가 이질들이기 때문에 전체일 수 있다. 통념적으로도 균일하다는 것은 종합과는 거리가 먼 표현이다. 균일한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종합적인 것이므로 종합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의 형태는 가시적인 것도, 형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요소들을 되도록 덜 균일하게 전체로 향하게 하는 조어造語 작업일 뿐이다.

정보의 교환을 제외하고 그것의 절대성이나 지시성을 따질 때, 문자라고 하는 건 어느 정도 의미 없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이 기호에서 기표와 기의를 나누어 추출해내야 했던 행위는 역설적으로 종교적 관점, 믿음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죄 사함의 방식을 죄라는 개념이 온 방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직접적 위해를 통해 찾는 고행의 방식이 문자의 세계에서는 그치지 않는 타락과 정화의 반복으로 몸을 바꿔 명멸한다. 우리가 언어라 부르는 대상은 그 자체에 부합되는 여타의 것도, 부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발화들의 당혹 속에 비로소 드러난다. 진리가 없을 때의 진리 찾기란, 외부에서 고통을 얻지 못할 때 당하는 내부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는 그런 효용 없는 수행에 오래 길들여진 고행자이며 우리가 그 내부적 고통을 알 길은 우리 자신이 수행을 감행하지 않는 한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문자의 외형적 성격, 즉 기호로서의 기능은 그것이 기호적 성격만 가능할 뿐 내재적 특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기술하는 것이 글자이건, 그림이건, 한글이건, 알파벳이건 거기에는 하등의 변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무변별적 속성을 무분별 자체로 이해하려는 시의 노력이다. 반면 이해는 반드시 구획된다. 지식은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범주화의 산물이다. 계열화하고 서열화하고 동일과 인접과 차이를 알아가는 것. 일반적으로 문학 텍스트를 읽을 때 작품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많지 않은데도 독자로서 작품에게 요구하는 바가 많은 경우는 단지 그것이 소비 주체가 공급 주체에게 바라는 가치의 등가성 같은 것에 기인하는 걸까? 이해와 향유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예술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가정이 맞다면, 현실은 예술에 담길 수 있을 만큼 대상으로서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대상이 경험적, 주관적으로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문학은 원칙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불안정한 대상에 대한 범주화를 시도하는 것은 감성 구조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논리 구조로는 가능하지 않다. 규정적 가치 부여에 대한 거부감은, 표면적으로 장르 등으로 구분되는 편의적 차이들 외에, 심층적으로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치환하려는 행위, 곧 모사나 비유로 대표되는 문학의 표상 방식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어떤 것이든 치환하는 순간 그 외의 것으로 비등한다. 나는 이 방식이 진/위의 표현 방식으로서는 퍽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도리어 문학적 방식으로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문학 자체가 치환의 병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기호의 만병萬病 환자와 같기 때문이다. 치명적 환자를 대면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건강해질 수 있다고 위로하며 속이거나 혹은 그저 죽을 자를 바라보거나. 문학자의 역할은 죽을 자에 대해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을 자를 바라보는 행위로 만족되어야 한다. 물론 바라보는 행위는 발화되면서 다시 기호적 행위로 바뀔 것이다. 죽을 자를 바라본 자 또한 죽을 자가 되는 악순환이 문학이라는 거대한 병동에서 영구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가장 불행한 인간의 한 예는 윤리에 대한 기준을 거부하면서도 윤리적이려는 인간일 것이다. 너무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규칙 안에 두려는 것, 즉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고 그 결과 사람은 너무 적게 바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온갖 인간적 행위의 타당함들, 곧 윤리들은 아주 작아져버린 사람에게나 가능한 불능의 단어가 되어갈 것이다. 간직할 때만 우리는 놓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는 이미 진부해진 잠언이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귀중한 시사는 그 말이 ‘비어 있어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비어 있다는 생각의 선행이 요구되어야 원칙적으로 그 자체와 그 반대편이 만족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관계를 ‘보살핌’이나 ‘간직됨’ ‘보호함’ 같은 단어로 표현했는데, 존재들끼리의 그런 보호, 건네받음, 간직됨을 직접적 관계로부터 도출하여 붙들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난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건네받음과 보호됨 자체가 이미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표상에서 찾는 것만큼 어리석고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 아마도 시는 그런 어리석고 난감한 사람의 마지막이며 유일한 조력자로 남을 것이다.

이 원고는 문학의 깊이를 문학의 넓이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다분히 정상적인 출판사를 만나기까지 여러 질곡을 겪었다. 출간을 결정해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이 글은 두 눈 모두 녹내장 판정을 받은 후 빛의 혹한을 상상하며 다듬은 글이다. 그간의 잡문들을 손보았다. 편폭이나 내용으로는 잡다하지만 시에 대한 글이라는 주제적 공통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에 관해 말한다는 건 누구의 것이 되었건 부질없다는 점에서 자명하지만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맴돌지도 않는 법이다. 나에게 시는 격류의 강과 같았으니 바라보기도 두려웠을 뿐, 훔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17년 봄
조연호
---「작가의 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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