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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몽식이

내 사랑 몽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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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5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378g | 130*190*50mm
ISBN13 9791104912818
ISBN10 110491281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20XX년 12월 겨울.
통행량이 제법 많은 왕복 6차선 도로는 이 동네의 거주 지역과 유흥 지역을 나누는 기준선을 겸한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 덕분에 거주 지역 주민의 태반이 유흥업에 종사한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엔 필수적으로 자리 잡는 몇몇 종류의 편의 시설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유흥가의 가장자리, 바로 옆 육교만 건너면 바로 거주 지역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패스트푸드 매장도 그런 편의 시설 중 하나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는 윤희가 근무하는 시간이다. 스물여덟. 대학 문제로 서울로 상경한 이후 쭉 다닌 곳인 데다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매니저나 점장이 됐을 법도 하건만 윤희는 여전히 그냥 아르바이트생이다.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윤희는 욕심이 없었다. 그저 당장 먹고 살 만큼의 돈만 쥐어지면 그뿐이었다. 윤희에겐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윤희는 작가 지망생이다.
매장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정확히 오후 3시를 가리켰다. 윤희는 마지막 손님의 주문을 받은 후 십 분쯤 미리 와 있던 다른 직원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모두에게 인사를 한 후, 홀가분하게 2층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때늦은 점심을 먹는 두어 팀의 손님뿐인 홀 한구석에는 ‘Staff only’라고 써 붙여진 문이 있었다. 윤희는 당당히 그 문을 밀고 들어가 나란히 자리 잡은 사물함 중 하나를 열었다. 이름표 따위는 없었지만 어영부영 윤희 전용이 된 사물함이었다.
윤희는 모자와 앞치마를 벗어 백팩에 쑤셔 넣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트를 꺼내 입었다. 플레어스커트처럼 밑단이 퍼지는 새빨간 코트였다. 코트 단추를 유니폼이 보이지 않게 꼭꼭 여민 후 검은 비니를 눌러쓴 윤희는 회색 머플러로 꽁꽁 싸맸다. 그리고 기운차게 백팩을 맨 후 휴게실을 나왔다.
퇴근의 기쁨에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 홀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경쾌하게 첫 번째 계단을 밟은 순간 뭔가가 휙, 윤희의 옆을 스쳐 내려갔다. 벌레라기엔 지나치게 크고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았다. 나선형 계단 탓에 스쳐 지나간 무언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일어난 윤희는 종종종 계단을 돌아 내려갔다.
이달의 행사 상품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는 문 앞에 ‘그것’이 있었다. ‘그것’은 팔락팔락 얇은 날개를 팔락이며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는 폼이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겨우 윤희의 손바닥만 한 크기에 불과한 터라 스스로 문을 열기란 무척 어려워 보였다.
휙, ‘그것’의 시선이 윤희에게 향했다. 윤희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는 불상사를 막았다.
사방이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그것’을 봤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겨야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그것’조차도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윤희는 결론을 내렸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야.’
지난 며칠 수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쓰고 있는 글이 잘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런 것이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은 윤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며 당당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착각이야. 환상이야.’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후 문을 밀었다. 그 순간 ‘그것’은 잽싸게 날개를 팔락이며 휙 윤희를 지나쳐 밖으로 빠져나갔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윤희는 헙, 숨을 들이켰다. 숨을 들이켠 것을 깨닫기 무섭게 윤희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그것’도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윤희가 한발 빨랐다. 비니를 푹 눌러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은 덕에 윤희의 시선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휑하니 가버렸다.
윤희는 애써 뭔가 잘못 본 거라고 재차 마음을 다잡곤 다시 활기차게 퇴근길에 올랐다.
‘그것’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흐지부지 완전히 잊혀 6개월이 지나 7월이 되었다. 날이 제법 무더워졌지만 윤희의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그저 매장 유니폼의 소재와 소매 길이뿐이었다.
시계가 오후 3시 30분을 가리켰다. 한 달 전에 바뀐 다음 근무자는 지각이 특기였다. 시계를 흘깃 확인하고 매장을 휘 둘러본 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성격 좋은 윤희라도 벌써 한 달째 꾸준히 지각하는 사람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윤희는 얼른 마음을 바꿔먹었다. 근무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돈을 더 버는 거라고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매장 문이 열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들어왔다. 제법 진하게 화장을 했지만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한 그녀는 윤희를 향해 연신 굽실거리곤 후다닥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윤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윤희가 퇴근 준비를 마치고 매장을 나섰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가까웠다. 가벼운 반팔 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윤희는 에코백을 휙휙 흔들어대며 육교를 건넜다.
매장에서 집까지 아침 출근 코스로는 오 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러나 윤희는 나무가 우거진 공원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퇴근 후엔 늘 운동 삼아 한 시간가량 공원을 거닐곤 했으니 오늘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려 가며 빠른 걸음으로 걷던 윤희의 눈에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아기 엄마들이 보였다. 각자 자신의 곁에 유모차를 한 대씩 세워두고 수다 삼매경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까르르 터지는 웃음이 경쾌해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리고 보았다. 윤희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것’이 유모차 앞에서 작은 날개를 팔락이며 둥실 떠 있었다.
‘그것’이 에벨레레레 기묘한 소리를 내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 행동에 맞춰 유모차 안 갓난쟁이가 까르르 발버둥을 치며 웃었다. 아기의 웃음소리에 신이 났는지 ‘그것’은 아기의 유모차 난간에 사뿐히 내려앉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쪽저쪽 손가락으로 하늘을 찔러대는 폼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 한참이나 쳐다본 끝에 윤희는 요즘 티비만 틀면 나온다는 걸그룹의 춤인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이 추는 모양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금방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것은 녀석의 노림수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섹시해야 할, 하지만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그 춤을 보고 아기는 또 한 번 발버둥을 쳐대며 요란하게 웃었다.
이번엔 변명거리도 없었다. 잠도 잘 잤다. 얼마 전 마감이었던 공모전에 응모한 후 스스로에게 한 달간의 휴식기를 하사했다. 때문에 당장은 헛것을 볼 만한 그 어떤 핑계도 없었다. 그래서 윤희는 아주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에는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잠자리의 날개처럼 투명했지만 모양은 나비의 날개처럼 널찍했다. 입고 있는 옷도 금방 나무에서 따낸 나뭇잎처럼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윤희는 대번에 팅커벨을 떠올렸다. 피터팬에 나오는 그 팅커벨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성별이 남자라는 거였다. 그걸 깨닫기 무섭게 윤희는 얼굴을 붉혔다. 작은 천 쪼가리 하나를 빼면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남자였다. 비록 그 크기가 작았지만 만약 진짜 사람 크기였다면 제법 건장했을 탄탄한 근육을 가진 남자.
남자 팅커벨은 춤을 추다가 속칭 ‘삘’을 받은 듯 행동이 점점 과장되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지러질 듯 웃으며 발버둥을 넘어 숫제 몸부림을 쳐 댔다.
“반응이 좋으니 내가 더 재밌는 걸 보여줄까?”
팅커벨이 말했다. 윤희는 깜짝 놀랐다. 말도 할 줄 알다니……. 말을 마친 팅커벨이 앙증맞은 팔을 휘둘렀다. 포로롱 작은 소리와 더불어 손끝에서 빛 가루가 흩뿌려졌다. 그 빛 가루들이 은하수처럼 한 줄로 길게 늘어지더니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유모차를 휘감았다. 그러자 유모차는 덜컹덜컹 흔들렸다. 바퀴를 따라 데구르르 굴러가는 게 아니라 양옆으로 덜컹덜컹 크게 흔들린 것이다. 아기는 이번에도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엄마는 달랐다.
한참 수다를 떨던 엄마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는 사색이 됐다. 유모차는 아무도 건들고 있지 않건만 뒤뚱거리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유모차가 살아 있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있던 두 여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정지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앉아 있던 두 여자는 뒤이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 각자의 유모차를 끌고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덜컹거리던 유모차의 임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창백한 안색이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봐도 될 법한 행동거지였다.
깔깔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팅커벨은 애기 엄마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허공에서 훌쩍 훌쩍 공중제비를 돌며 깔깔거렸다.
그때까지도 윤희는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됐다. 애기 엄마는 왜 아무렇지 않게 그냥 가는 걸까? 저 작은 날개 달린 생물이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팅커벨이 고개를 돌렸다. 윤희는 흠칫 놀랐다. 팅커벨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윤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팅커벨은 똑바로 윤희를 향해 날아왔다. 윤희는 얼른 홱 몸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평일에 늘 걷던 산책로가 아닌 집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야!”
귓가에서 버럭, 소리가 들려왔다. 목덜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러나 윤희는 모른척했다.
“야! 너 나랑 눈 마주친 거 봤거든!”
팅커벨은 윤희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윤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뚜벅뚜벅 집을 향해 열심히 걸을 뿐이었다. 윤희의 시야 안에서 팔락팔락 날갯짓하던 팅커벨이 말했다.
“걷는 거 어색하거든?”
윤희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21세기 대한민국에 팅커벨이 존재한다는 걸 믿으란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끝까지 모른 척한다 이거지?”
흐응, 팔짱을 끼고 고심하던 팅커벨이 휙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했지만 윤희는 꿋꿋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다. 겨울엔 웃풍이 세고 여름엔 찜통이 따로 없는 허름한 다세대 빌라의 반지하. 비록 볼품없긴 했으나 나의 집, 마이 홈. 윤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동시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였다. 그런데 좀 이상한 발소리였다. 다그닥, 덩치 큰 말이 솜이불 위를 천천히 걷는 것 같은 소리였다. 동시에 등 뒤에서 흥, 하는 뜨거운 바람이 덮쳐 왔다. 전신을 휘감는 열기에 등골이 오싹했다.
걸음을 멈추자 그릉그릉 숨 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크기였다. 그에 맞춰 뜨거운 열기가 자꾸만 등에 뿜어졌다. 이것은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숨을 뿜어낼 때마다 유니폼이 들어 있는 에코백이 펄럭펄럭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움직였다. 얇은 티셔츠도 파라락 거칠게 펄럭였다.
다시 한 번 사람의 것이 아닌 기묘한 발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도 더욱 가까워졌다. 윤희의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제 윤희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화등잔만 한 눈동자가 노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커다란 콧구멍에선 연신 흥, 흥, 콧바람이 뿜어졌다. 윤희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웃는 것처럼 씩 커다란 입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나란히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였다. 커다란 호랑이가 윤희의 등 뒤에서 보란 듯이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윤희의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호랑이는 터벅터벅 천천히 윤희를 향해 다가왔다.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윤희는 홱 몸을 돌리더니 냅다 달렸다. 집이 코앞이었다.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계단으로 뛰어든 윤희는 용케 넘어지지도 않고 내려갔다.
그러나 현관이 문제였다. 부들거리는 손가락은 비밀번호를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비번을 틀리자 낯선 경고음이 삑삑삑 울렸다. 윤희는 무시하고 재차 비번을 누르려 했다.
[삼 분 후에 다시 하십시오.]
낭패였다.
“저기…….”
윤희는 꺅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울음이 났다. 윤희는 꺼이꺼이 울었다. 남은 생, 길 거라 여겼건만 이렇게 가는구나 싶었다.
“아니, 저기, 장난이었는데…….”
그 말은 윤희의 뇌리에 전달되지 못했다. 윤희는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믿고 있었다.
“미안해. 그니까 좀 그만 울어라. 응?”
세 번째가 되자 윤희도 드디어 알아듣곤 뚝, 울음을 그쳤다.
“이제 그친 거야?”
아까보다 한톤 높은 목소리였다. 윤희가 울음을 멈춘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러나 윤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 팅커벨과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말하는 호랑이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삼 분 지난 거 같은데 문 안 열 거야?”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굵직하고 낮은, 성우 하면 딱 좋겠다 싶은 그런 목소리였다. 윤희는 슬쩍 손가락 사이로 실눈을 떠보았다. 차마 겁이 나서 고개까진 들지 못했다.
윤희의 눈에 커다란 발이 보였다. 신발을 신지 않았고 양말도 없었지만 분명히 발가락 다섯 개가 달린 사람의 발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양말과 신발뿐 아니라 바지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딱 봐도 남자 다린데 핫팬츠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사람 발이 달린 호랑이, 혹은 괴물, 그런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평소 허무맹랑한 생각에 빠져 산다고 여기저기서 타박을 많이 받아왔었다. 대체 그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고 현실에 있을 법한 상상을 좀 하라고 많은 사람들이 윤희에게 말했었다. 그러나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팅커벨을, 도심 한복판의 대호를. 그렇다면 사람 발이 달렸고 말도 할 줄 아는 그러나 상체는 인간이 아닌 그 어떤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쫌, 이제 장난 안 친다고.”
커다란 손이 윤희의 양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어찌나 힘이 센지 깃털이라도 들어 올리듯 가뿐한 움직임이었다. 그 정도라면 잡힌 팔도 당연히 아파야 할 텐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윤희는 용기를 냈다. 상대를 이렇게 배려할 줄 아는 존재라면 그 생김새가 좀 괴이하더라도 분명 마음이 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녀와 야수. 이렇게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존재라면 야수인들 어떠랴? 생각과 동시에 윤희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갈색 눈동자가 씩 웃고 있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눈부시게 빛났다. 갈색 곱슬머리는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였다. 한여름, 백사장에서 휴가라도 보냈는지 구릿빛 피부가 인상 깊었다.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었다. 괴물도 없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윤희 또래의 잘생긴 남자였다. 그것도 한순간에 홀려 버릴 만큼 대단한 미남자.
“미안해.”
환한 미소로 윤희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한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가 고개를 숙인 통에 덩달아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 윤희는 얼굴을 붉혔다.
덩치 큰 남자는 팅커벨의 날개가 달린 야생의 타잔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잔. 그러니까 현재 눈앞의 남자는 반나체였다.
잔뜩 얼굴을 붉힌 와중에도 탄탄한 근육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자꾸만 눈길이 가는 통에 윤희는 쳐다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택배 아저씨와 음식 배달부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넘어본 적 없던 윤희의 집 현관문을 당당히 넘어 입성한 남자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윤희는 커피를 타면서도 연신 남자를 힐끔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날개 달린 인간이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을 끌어당기기 충분했거늘, 그러나 윤희가 자꾸 쳐다보는 이유가 단순히 날개 때문이 아닌 것은 만천하가 다 알고 있었다.
윤희는 여전히 살짝 홍조가 어린 얼굴로 조심스레 커피를 내려놓았다. 투명한 큰 잔에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커피였다. 무더운 날씨에 벌써 송글송글 맺혀 버린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보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했다. 커피를 내려놓으면서도 연신 훔쳐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쳤다. 윤희는 죄인처럼 깜짝 놀랐으나 남자는 씩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확실히 보이는 거지?”
남자의 시선은 당당하게 윤희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윤희는 그 눈빛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입을 열었다간 말이라도 더듬지 싶어 커피 잔을 받쳐 들고 있던 쟁반을 들어 얼굴을 반쯤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지?”
윤희는 한 번 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윤희를 끌어안았다.
“지금 내가 얼마나 반가운지 넌 아마 모를 거야!”
남자는 정말로 기쁜 눈치였다. 그러나 윤희는 난감했다. 훨씬 더 큰 남자의 키 덕분에 윤희는 품에 폭 안긴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의 가슴근육이 윤희의 뺨에 닿았다. 그것을 느낀 윤희는 기겁을 하고 남자를 밀쳐 냈다.
글쓰기에 집중하느라 연애를 안 한 지 좀 되었다. 가끔 썸 비슷한 걸 타보기도 했지만 늘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왔었다. 스킨십 비슷한 걸 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 특히나 보기 좋은 떡이라면 그 기습 공격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을 긴 공백기였다.
윤희의 반응에 남자는 얼른 팔을 풀었다.
“왜?”
“옷!”
잔뜩 얼굴을 붉힌 윤희의 외침에 남자가 반문했다.
“옷?”
그러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말을 마치곤 검지 손가락을 세우더니 휙, 휘둘렀다. 반짝이는 작은 나비 한 마리가 춤을 추듯 허공에 기묘한 문양을 그려냈다. 문양은 심장이 뛰기라도 하듯 두근두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팟, 하고 사라졌다. 동시에 날개가 사라졌다. 그리고 남자는 옷을 입은 모습이 되었다. 두툼한 남색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윤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여름인데?”
남자는 자신의 이마를 탁 치더니 다시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남자의 차림새가 또 바뀌었다. 헐렁하게 잔뜩 늘어지는 민소매 티셔츠에 여기저기 찢어진 5부 반바지였다. 윤희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낫네. 날개는? 없어도 괜찮아?”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늘만 못 날고 마는 거라 상관없어.”
윤희는 어이없단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하늘을 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나야 늘 날아다녔으니까 뭐.”
별거 아니라는 듯한 남자의 말에 윤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윤희의 웃음에 남자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뭐가?”
“이제 웃잖아. 아까는 정말 미안해. 그냥 날 못 본 척하니까 화가 나서 놀라게 하려고 한 건데 내가 너무 과했어.”
“아니야. 나 같아도 누가 날 자꾸 무시하면 화가 났을 거야.”
진심이었다. 이리 떡하니 눈앞에 있는 존재를 왜 못 본 척했을까? 윤희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이름은 라플라카야.”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윤희.”
“반가워. 잘 부탁해.”
얼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면서도 윤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뭘 잘 부탁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그러니까 뭘……?”
라플라카가 씩 웃었다.
“나 이제부터 여기서 살 거야.”
“뭐?”
라플라카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나 이제부터 여기서 살 거라고.”
“누구 맘대로!”
윤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라플라카는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단 얼굴로 대꾸했다.
“드디어 나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당연한 거 아냐?”
윤희의 얼굴이 삽시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만지긴 뭘 만진단 말인가? 아니아니 어쨌든, 갑작스러운 동거라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름 말고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윤희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라플라카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이건 뭐야? 달력 같은데 무슨 가위표가 이렇게 많아?”
그는 하나뿐인 방에 침입해 윤희의 탁상 달력을 넘겨보는 중이었다. 민망하게도 그간 도전했다 실패한 공모전 리스트가 수두룩했다. 공모전이라는 소식을 들으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잡지사일지라도 득달같이 참여한 터라 생긴 훈장 아닌 훈장들이었다.
윤희는 얼른 달려와 달력을 빼앗았다.
“고, 공모전에서 떨어진 표시야.”
대충 얼버무려도 될 것을 상대가 하도 악의 없이 순진하게 묻는 통에 윤희는 자신도 모르게 솔직히 대답하고 말았다.
“공모전?”
“응 등단하려고 대학 다닐 때부터 해왔거든.”
“그래? 대단한걸?”
말을 마친 라플라카가 기특하단 눈빛으로 슥슥, 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 취급에 버럭 화가 나야 옳았건만…… 윤희는 그러지 못했다.
그간 같은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한결같았다. 이제 그만두고 취직해라, 언제까지 그렇게 아르바이트만 해가며 먹고 살 거냐, 능력이 없으면 취집이라도 하든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하나둘 거르다 보니 어느덧 집과 매장 말곤 오가는 데가 없는 삶이 되고 말았거늘…….
기분이 좋아진 윤희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대,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어? 노랑둥이네?”
라플라카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민망해진 윤희가 입을 삐쭉거렸다.
“돼호라는 이름이 있거든?”
행거에 걸린 윤희의 빼곡한 옷 틈에서 노란색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기지개를 켜며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 주인이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잔 거야?”
“고양이잖아.”
그가 피식 웃었다.
“하긴…… 돼호는 무슨 뜻이야?”
“돼지 호랑이.”
대답을 듣자마자 라플라카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야, 이름을 너무 잘 지은 거 아냐?”
윤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한 센스 하지.”
라플라카는 키득거리며 돼호를 쓰다듬었다. 돼호는 그대로 발라당 뒤집더니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윤희가 눈을 흘겼다.
“흐응, 돼호 너 자존심은 어디 간 거야? 고양이의 자존심을 지켜보라고!”
“진리의 노랑둥이라잖아. 길고양이들도 노란 애들이 사람을 좋아해.”
돼호는 라플라카에게 몸을 부비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희는 문득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던 게 생각났다.
“사람들은 못 보는 거 같던데…….”
“응. 대부분은 못 봐.”
“근데 고양이랑 아기는 어떻게 봐?”
“얘들은 쫓기는 게 없잖아. 느긋하고 여유 있고 행복하니까. 행복한 존재들만 나를 볼 수 있거든.”
“행복?”
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자신이 행복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남들도 늘 그러지 않았던가? 외롭지 않니? 그 돈 가지고 어떻게 살아? 노후엔 어쩔 건데?
윤희를 힐끔거린 라플라카가 씩 웃었다.
“행복 그거 별거 아냐. 꿈과 희망이 있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면 그게 행복이지 뭐.”
“그런…… 가?”
그게 행복이라는 덴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뭐 어쨌든 좋은 주인인가 보네. 이 녀석 행복해하잖아.”
윤희가 피식 웃었다.
“녀석이 과연 날 주인으로 생각하는진 모르겠네. 수발 들어주는 하인쯤으로 여기지 않을까?”
“아무렴 어때 녀석이 행복하다는데. 동물이라고 무조건 날 보는 건 아냐.”
“뭐 길 고양이라면야…….”
“길 고양이 말하는 거 아냐. 버젓이 주인이 있는 녀석도 날 못 보는 경우 부지기수야. 기껏 놀려고 찾아낸 개나 고양이가 날 못 보면 얼마나 우울한데.”
윤희는 주인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애완동물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라플라카의 말끝에 달라붙은 묘한 쓸쓸함을 눈치챘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 주지 못하는 세상. 윤희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고, 돼호 봐라.”
라플라카가 또 낄낄거렸다. 돼호는 자기 밥그릇 앞에 앉아 물끄러미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료 내가 줘도 돼?”
“얼마든지.”
윤희는 손가락을 들어 돼호의 사료 봉투를 가리켰다. 라플라카는 신이 나서는 냉큼 다가가 사료를 푸더니 이내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곤 돼호의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라플라카의 행동에 윤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더럽잖아.”
윤희는 말을 잃었다. 육안으로 보기에 멀쩡한 밥그릇이었다.
“아무리 고양이라도 깨끗한 밥그릇에 밥을 먹을 권리가 있지 않겠어?”
라플라카는 마치 자기 집인 양 태연하게 싱크대로 향했다. 그러곤 멈칫했다. 싱크대엔 그릇이 쌓여 있었다.
“이런 건 바로바로 해야 되는데…….”
라플라카는 이번에도 자기 집인 양 태연하게 고무장갑을 끼더니 설거지를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언제 해본 것인지 아주 능숙하게 돼호의 밥그릇까지 싹 닦더니 착착 나란히 엎어놓기까지 했다. 혼자인 살림이라 그다지 많진 않았으나 윤희는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행주 대신 키친타월로 돼호의 밥그릇에 남아 있는 물기까지 싹 제거한 라플라카는 그제야 그릇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사료를 퍼서 밥그릇에 부어주었다.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던 돼호는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천천히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밥 먹는 돼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라플라카가 몸을 일으키더니 여기저기 살폈다. 돼호의 지저분한 밥그릇이 라플라카의 무언가를 건든 모양인지 날카로운 눈매였다.
“흐응…….”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분주히 움직였다. 윤희는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어리바리 서 있기만 했다. 라플라카는 온 집 안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주인인 윤희에게 묻지도 않고 욕실의 수건 하나를 꺼내더니 걸레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대체 뭐 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려보려 했으나 때마침 라플라카는 더러워진 걸레를 쳐다보곤 헛구역질을 하는 참이었다. 새카맣게 변해 버린 걸레를 보며 윤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아르바이트와 글쓰기를 병행하느라 시간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윤희의 눈에는 그저 말끔해 보이는 집이었던 터라 딱히 청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으악! 대체 털투성이 집에서 어떻게 산 거야!”
행거에 걸린 윤희의 옷가지를 확인한 라플라카는 숫제 비명까지 내질렀다. 윤희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돼호를 냅다 들어 안고 주물럭거렸다.
“아니 뭐 고양이 털 조금 묻은 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이게 조금이냐?”
라플라카가 내민 빨간 모직 코트의 아랫단은 고양이 털이 잔뜩 붙어 모피 코트라 해도 손색없을 지경이었다. 어둡고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고양이의 특성상 행거의 늘어진 옷 틈은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여 돼호가 수시로 들락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윤희는 그저 치워봤자 소용이 없으니 내버려 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여름인데 겨울옷이 왜 걸려 있는 거야?”
라플라카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윤희의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라플라카가 어찌나 당당한지 윤희는 차마 내 집이라고, 내가 집주인이라고, 신경 끄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윤희는 고롱거리는 돼호를 품에 안은 채 거치적거리는 짐짝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한참 부산을 떨던 라플라카가 일을 마쳤을 때, 바깥은 이미 깜깜해진 밤이었다.
“봐, 깨끗하지?”
솔직히 윤희는 어디가 어떻게 말끔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유리창 같은 거야 좀 말끔해져 보이기도 했으나 나머지는 좀 정돈됐다는 느낌이 든 것 말고는 늘 똑같은 집일뿐이었다. 어차피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 열심히 청소한들 뭐 얼마나 바뀌겠는가?
그러나 차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라플라카의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서 칭찬해 줘!’라고 외치는 강아지 같은 눈빛에 풉, 웃음이 났다.
“뭐야 왜 웃어?”
“아, 아니, 귀여워서…….”
“내가 귀엽다고?”
라플라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희는 얼른 웃음을 지워내고 정색했다. 다 큰 남자에게 귀엽다니, 실례가 되는 말이 아니던가? 이 일을 어찌 수습하나 고민하는데 라플라카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럼 귀여우니까 계속 같이 살아도 되는 거지?”
“뭐야, 그러니까 지금 나 집안일 잘하니까 계속 같이 살자, 그거야?”
“응.”
솔직담백한 대답이었다. 윤희는 고민스러웠다. 솔직히 집안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글 쓸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난 나랑 돼호 생활비 대기도 벅차.”
하루 여섯 시간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백만 원 남짓. 그나마 집이 전세니 망정이지 월세였으면 턱도 없을 금액이었다. 그러나 라플라카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듯 소리쳐 외쳤다.
“괜찮아! 안 먹어도 안 죽어!”
“안 먹어도 된다고?”
라플라카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끔 별식 삼아 이것저것 먹기도 하는데 그게 딱히 생존하고 연관된 건 아니라 안 먹어도 안 죽어.”
윤희가 흐응, 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어쨌든 먹긴 먹는단 거잖아.”
라플라카가 불쌍한 얼굴을 했다.
“제발.”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다 큰 남자가…….”
“어차피 다른 사람 눈엔 안 보여. 동거니 뭐니 하는 헛소문이 날 일도 없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윤희는 머뭇거렸다. 동거한다고 소문 좀 나면 어떠랴? 요즘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걸로 흠 잡힐 시대도 아니거니와 누군가 뭐라 한들, 신경 쓸 윤희도 아니고 혼삿길 막힌다고 머리채를 휘어잡을 가족도 없었다. 한 명 있긴 했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안 되는 유산 분배가 끝나자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다만, 문제는 윤희 자신이었다.
눈앞에서 애걸복걸하고 있는 라플라카는 연예인들과 나란히 세워놔도 꿀릴 게 없을 외모였다. 떡 벌어진 어깨에 과하지 않은 근육, 조각 같은 얼굴, 반짝반짝 빛이라도 뿜어내는 듯한 머릿결, 거기에 생기 넘치는 눈동자까지……. 생전 처음 보는 여자라도 한 번 이상 뒤돌아보게 할 남자가 한집에 살고 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윤희는 고민했다. 상대가 상처 입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거절이란 그 자체만으로 상대를 상처 입힐 수밖에 없지 않던가? 고민을 끝낸 윤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거절하려 했다. 동시에 라플라카도 입을 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대화가 가능한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내가 꿈속의 존재인 건 아닌가 늘 고민했었어. 아기들이라도 날 알아봐 주지 않았다면 아마 난 미쳤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응?”
라플라카의 눈빛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거절을 위해 준비되었던 말은 쑥 가라앉아 버렸다. 라플라카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알아본 윤희는 차마 그를 내칠 수 없었다.
윤희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단 집안일 말끔하게 잘하기. 괜히 어디 가서 사고 치지 않기. 글 쓸 때 방해하지 않기. 콜?”
윤희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플라카가 와락, 윤희를 끌어안으며 ‘콜!’을 외쳤다. 당황한 윤희는 그를 밀어내려다가 금세 마음을 바꿨다.
뭐 가끔, 이런 식으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언제나 늘 그랬듯 윤희는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떴다. 아무 생각 없이 방을 나선 윤희는 식탁 위에 차려진 밥상을 마주하고 당황했다. 찬장에 들어 있던 즉석밥과 냉장실의 유일한 재료였던 계란으로 만든 계란국, 냉동실에서 잊혀가던 냉동식품으로 차린 반찬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밥상이었다.
“이게 웬…….”
“내가 차렸어. 언제 일어나는지 몰라서 너무 일찍 하는 바람에 좀 식은 게 흠인데…….”
라플라카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윤희는 현실로 돌아왔다. 라플라카는 국을 데운다, 반찬을 데운다 부산을 떨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나는 내가 꿈속의 존재인 건 아닌가 늘 고민했어.”

갑자기 라플라카가 불쌍해 보였다. 간밤에 더워 죽겠음에도 라플라카 때문에 헐벗고 잘 수 없어 짜증스러웠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얼른 씻고 와서 밥 먹어.”
라플라카는 윤희의 등을 떠다밀었다. 윤희는 어영부영 욕실에 들어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사이 완벽해진 밥상을 앞에 놓고 라플라카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윤희는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라플라카가 잽싸게 맞은편에 앉아 윤희를 바라보았다. 국을 떠먹으려던 윤희가 고개를 들어 라플라카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초조해 보였다. 그 이유가 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 윤희는 한숨을 쉬었다.
“내쫓지 않을 테니까 그러지 마.”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면 어쩔 수 없지……. 잠깐이라도 좋아. 나 정말 네가 싫어하면 여기 안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임을 빤히 알고 있는 터라 윤희는 피식 웃으며 국을 먹었다.
“뭐, 요리도 잘하네.”
빈말이 아니었다.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재료들뿐이었거늘, 계란국은 제법 먹을 만했다. 빨간 국물……. 육수를 낼 만한 것도 조미료도 없었는데 어떻게 만든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확실히 맛은 있었다.
윤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예쁜 마누라는 삼 년, 요리 잘하는 마누라는 삼십 년이라는데 일단 삼십삼 년만 살아볼까?”
“진짜?”
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고마워!”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라플라카가 벌떡 일어났다. 엉거주춤 들린 팔을 보니 끌어안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가 아무리 팔다리가 길고 키가 크다 한들 밥상이 차려진 식탁을 가운데 두고 그러기란 무리였다. 그걸 깨달은 듯 그는 민망한 얼굴로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싱글벙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윤희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유나 시리얼로 대충 때우고 다니다가 밥을 먹으니 든든하니 좋았다.
윤희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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