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r. 훌리아 아타나소풀로
눈부시게 화창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12월 어느 날, 나의 친구 호르헤를 만나러 갔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자주 점심을 같이 먹었다. 하지만 이번 점심은 그전과 달랐다. 작별을 고하는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스페인에 정기적으로 갈 일이 있었다. 그러다 그라나다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결국 나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유로 호르헤와 작별하게 된 것이다.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책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그런 다음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었다.
마침내 어둠이 찾아왔다. 우리는 서로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곧 보자.”
그 후 2년, 그라나다에서 정신과 개업의로 안정을 찾아가던 즈음이었다. 어느 날 나는 호르헤에게 편지를 썼다. 문득 나와 함께 일하자고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체 없이 답장이 날아왔다. 호들갑스러운 어조로 무조건 좋다는 내용이었다. 호르헤다웠다.
그때부터 1년에 두어 번씩 닥터 호르헤 부카이는 이곳으로 왔다.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기쁨을 다시 누리게 되었다. 호르헤의 방문 진료 기간 동안 우리 환자들은 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책을 통해서도 호르헤를 알게 되었다.
나의 요청으로 호르헤가 자신이 쓴 책 [데미안을 위한 이야기] 몇 권을 여행 가방에 담아서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내 친구와 환자들은 집어삼킬 듯 허겁지겁 읽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줬다. 그러면 그 친구는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게 되었다. 나는 호르헤에게 이곳 스페인에서도 그의 책을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의 존재가 스페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이 책은 유럽 전역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책이 그것이다.
[2장. 사슬에 묶인 코끼리 _ 원래 못하는 일]
“못하겠어요.” 데미안이 말했다. “난 못해요.”
“확실해요?” 호르헤가 물었다.
“네. 그녀에게 내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정말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은 하지 못하는 놈이에요. 내가 알아요.”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데미안이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호르헤는 벌써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어렸을 때 호르헤는 서커스를 무척 좋아했다. 서커스 중에서도 동물 쇼가 가장 좋았다. 특히 코끼리는 호르헤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렸다. 쇼를 하는 동안 그 커다란 짐승은 엄청난 크기와 육중함 그리고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쇼가 끝난 후에는 어김없이 쇠사슬을 한 쪽 발목에 차고 땅에 박아놓은 작은 말뚝에 매이고 말았다. 다음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늘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코끼리가 그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뚝은 아주 작은 나무 조각에 불과한데다 10센티미터 정도 땅에 박혀 있을 뿐이었다. 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뽑아낼 정도로 힘센 코끼리가 말뚝에서 벗어나 도망가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호르헤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코끼리는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코끼리는 왜 도망치지 않을까?
(……)
“서커스 코끼리가 도망가지 않는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뚝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르헤는 두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갓 태어나 의지할 곳 없이 불안해하는 아기 코끼리가 커다란 쇠사슬로 말뚝에 묶여 있는 모습을. 어린 코끼리는 온 힘을 다해 결박을 풀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그 말뚝은 어린 코끼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견고했을 테니까.
기운을 모두 소진한 아기 코끼리는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뜬 코끼리는 다시 한 번 탈출을 시도했다.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쇠사슬을 당기고, 말뚝을 밀고, 온 몸이 상하도록 애를 썼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노력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어린 코끼리의 일생에서 가장 끔찍한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순응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커스에서 만나게 되는 거대하고 강력한 코끼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기였을 때 느낀 무력감이 커다란 코끼리가 된 지금도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데미안,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서커스 코끼리와 닮아 있어요.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조그만 말뚝 수백 개에 묶여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거죠.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요.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해봤다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코끼리처럼 ‘나는 못 해. 나는 못하는 놈이란 걸 알고 있어. 나는 앞으로도 절대 못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자신에게 각인시킨 거죠.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메시지에 짓눌린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겁니다.”
호르헤는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내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앉은 다음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데미안도 지금 그런 일을 겪고 있는 거예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전의 데미안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길들이며 살고 있는 거죠.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를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시도해보는 겁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시도해보세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 p.18~22쪽
[4장. 반지의 진정한 가치 _ 열등감에 시달리던 젊은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고 존경받아야 자신의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부모님은 나를 믿어주지 않았고, 친구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직장 상사도 내가 한 일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뚱보 선생이 나에게 마테차를 건네주면서 운을 떼었다.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나이 많은 현자를 찾아 나선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예요. 지금 데미안의 말을 들으니 그 젊은이가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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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매사에 서툴고 똑똑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뭘 하고자 하는 마음이 통 생기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합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 놈이라고요.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저를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하려면 무얼 해야 할까요?”
현자는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네만, 나는 도와줄 수가 없네. 내 코가 석자라서 말이지.”
그런 다음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여 말했다.
“자네가 손을 좀 빌려주면 내 문제를 더 빨리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나도 자네를 도와줄 수 있겠지.”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
젊은이는 순순히 현자의 말을 받아들였다. 평생 사람들에게 무시당해온 젊은이는 언제나 자신의 욕구나 필요를 우선순위로 놓지 않았다.
“좋네.”
현자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젊은이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밖에 있는 말을 타고 시장으로 가게. 내가 이 반지를 팔아야만 하거든. 그 돈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네. 그러니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팔아주게. 단, 금화 한 닢 아래로는 절대 팔아서는 안 되네.”
젊은이는 반지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상인들을 찾아가 반지를 팔겠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반지를 보고 흥미를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젊은이가 가격을 부르기 전까지였다. 젊은이가 금화 이야기를 꺼내자 몇몇 상인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상인들은 그대로 외면하고 가버렸다. 한 노인만이 금화 한 닢을 주고 그 반지를 살 사람은 없을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은화 한 닢과 동화 한 항아리를 주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금화 한 닢 아래로는 절대 팔면 안 된다는 현자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시장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족히 백 명 넘는 사람들에게 반지를 내밀어 본 후에야 젊은이는 말에 올라타고 자신의 실패에 낙담하며 돌아갔다. 젊은이는 정말로 현자에게 금화 한 닢을 가져다주고 싶었다. 현자가 빚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조언과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젊은이는 현자의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부탁하신 일을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은화 한 닢 정도면 몰라도, 저 반지의 실제 가치 이상으로 돈을 받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 가치라… 젊은 친구, 방금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했네.”
현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반지의 실제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봐야겠군. 이번엔 말을 타고 보석상을 찾아가 보게. 그보다 더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보석상에 가서 반지를 팔고 싶은데 얼마나 쳐줄 수 있냐고 물어보게.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든지 절대로 반지를 팔지는 말게. 내 반지를 가지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주게.”
그래서 젊은이는 다시 한 번 길을 나섰다. 보석상은 젊은이에게 받은 반지를 만져보더니 천천히 불에 비춰보았다. 반지의 구석구석을 돋보기로 세심하게 살펴보고 무게까지 달아보고 난 다음 말했다.
“젊은이, 자네 스승에게 말씀드리게. 이 반지를 당장 팔고 싶다면 금화 58닢 이상은 쳐줄 수 없다고 말일세.”
“금화 58닢이요!”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네.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면 70닢까지도 쳐줄 수 있네. 하지만 당장 팔아야 할 정도로 급하다면…….”
젊은이는 잔뜩 신이 나서 현자의 집으로 돌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
“앉게.” 젊은이의 설명을 들은 현자가 말했다.
“자네도 이 반지와 같네. 독특하고 가치 있는 보석이지. 진짜 전문가만이 자네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네. 그런데 왜 자네는 모든 사람들이 자네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말을 마친 현자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문제의 반지를 다시 끼웠다.
--- p.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