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불 같은 질책에 준수가 눈을 가볍게 감았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이들 중 가장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들의 탈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 2-1권, p.9
산 밑에선 벌써부터 요란한 불빛들이 이들을 향해 조여 오고 있었다. 거리가 이렇게 어수선한데 어째서 주변의 경찰차 한 대 나서지 않는 것인지. 결코 풀리지 않을 궁금증을 뒤로 하고 이들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나갔다. --- 2-1권, p.16
이제까지 바닥에 누워 있던 승현이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빛을 향한 그의 시선은 어느새 여정이 비춘 통로의 한쪽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림자대로라면 통로는 저 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족으로 꺾인 그 이상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 --- 2-1권, p.23
그녀가 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이 하나의 게임인 거야.”
게임? 그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어느덧 여정은 큰 보폭으로 길을 나서고 있었다. --- 2-1권, p.62
승전보를 거의 움켜쥐었을 때 발생한 영락대제(永樂大帝)의 실종이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은 불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군인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전에 재빨리 왕을 찾아야 했다. 전쟁의 지휘부는 재빨리 네 명의 무사를 뽑아 왕을 찾아 나설 수색조를 꾸렸다. --- 2-1권, p.109
폐왕은 그녀의 계획된 움직임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인에게 지금 그네가 하려는 행동이 지극히 위험하고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터였다. 폐왕은 주도면밀하게 짐을 싸는 부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래, 이게 자네였던가. --- 2-1권, p.119
“지금이라도 다시 할아버지를 부를까요?”
희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경이 쓰이는 것은 노인이 가져간 책이 아닌 여정이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대로 혼이 나간 듯했다. --- 2-1권, p.146
지금까지 여자의 말을 반신반의하던 지훈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큰 사건에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단지 클릭 한 번 했을 뿐인데. 심장 박동이 점점 거세어졌다. --- 2-1권, p.159
아무래도 창밖의 빛만을 이용해서는 출구를 발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은 나뭇조각으로 엉켜 있는 바닥에 비밀 통로가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누구도 쉽게 손을 놀릴 수는 없었다. --- 2-2권, p.7
벽이 들리자 진회색 돌로 이루어진 평편한 공간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짧은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처럼 나타난 눈에 익은 광경에 여정이 가장 먼저 발을 내밀었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자신이 나온 곳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 2-2권, p.15
바짝 긴장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창문 밖 선로를 향했다. 지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그들이 취조했던 단발머리의 여자가 독립문역을 빠져나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2-2권, p.18
설상가상으로 조사를 나갔던 부하 직원은 독립문역에는 그러한 비밀 출구가 없다고 했다. 분명 그곳에서 탈출을 하였으나, 어느새 사라졌다는 출구의 존재는 이들을 난간 없는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 2-2권, p.24
이들의 은둔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이것이 더 편안한 방법이었다. ‘저들’에 대한 정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숨어 버리고 싶었다. --- 2-2권, p.27
연말 종로의 밤은 낮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동궁 뒤편의 작은 문에 도달한 여정이 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기대하던 어둠이 한층 주변을 채워 나갔다. --- 2-2권, p.78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가 여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나가신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독립문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까지 가셨는지. 하지만 다 그쪽 생각이었죠?”
여정의 눈꺼풀이 흠칫 떨렸다. --- 2-2권, p.84
“멀지 않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에 있는 최승현 씨와 김준수 씨도 모두 데리고 나오십시오.”
남자의 말은 정중했지만 강압적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승현과 준수가 여정을 따라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자선당 마당을 수십은 족히 될 듯한 남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 2-2권, p.101
그들이 두려움을 감수하고 집에서 나온 유일한 이유인, 희원이를 구할 수 있었던 24시간이 이미 지나가 있었다. 지금은 희원이가 살아 있을지조차 확실할 수가 없었다. --- 2-2권, p.113
투서를 손에 쥐고 나인을 물리기 전 그 아이에게 투서를 전달한 사람이 노란 머리를 가졌느냐 하니 아직도 숨을 고르지 못한 나인은 그건 아니옵니다 하였지만, 그럼 섬나라 사람의 억양을 가졌더냐 하는 물음에는 그건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고 대답하니 투서를 잡고 있던 손이 갑자기 떨리고저. --- 2-2권, p.148
무엇을 하면 앞으로 세상에 나가 온 백성에 당당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 조선의 역사를 내 손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여 천천히 붓을 드니, 이것이 ‘죽은’ 민비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로구나.
--- 2-2권,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