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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 윈스턴 처칠, 그 불굴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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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7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504쪽 | 664g | 153*224*35mm
ISBN13 9788950925567
ISBN10 895092556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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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그는 누구인가?

“그는 내가 평생 동안 만난 사람 중에서 위인의 요건을 가장 가깝게 충족시켰다. 나는 더 훌륭한 인격자와 더 현명한 철학자, 더 이해심 깊은 선인을 만났지만 그보다 위대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_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p.475

“사실상 그는 언제나 ‘내가 이 일 혹은 저 일을 하면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영국이 지금 어떤 일을 해야 역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할까?’라고 자문했다. …… 그는 언제나 ‘최고의 시간’을 찾았고 즉각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_클레멘트 애틀리 --- p.476

“그는 영국의 사례를 세계의 운명으로 만들고, 영국 국민들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도록 이끄는 위대한 선구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의 이름은 강하고 용맹하며 헌신적인 국가가 기꺼이 따르고자 할 때 용기를 주는 말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_애너린 베번 --- p.471

기꺼이 전쟁터로 떠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흥미를 느꼈고 매혹당하기도 했다. 유년기의 매혹은 청년기의 경험을 거쳐 장년기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모든 뛰어난 역사가들은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지만 1924년에 처칠이 쓴 “인류의 이야기는 곧 전쟁이다.”라는 글만큼 그것을 명확하게 드러낸 경우는 없었다.
그에게 전쟁은 흥분을 자아내고 복잡하며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는 전쟁을 연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또한 그는 전쟁에 빠져드는 자신의 성격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문장을 살펴보라.

아, 영광스러운 자와 비열한 자, 불쌍한 자와 숭고한 자의 놀라운 메들리와도 같은 끔찍한 전쟁이여. 만약 지도자들이 너의 얼굴을 더 가까이 본다면 보통 사람들은 다시는 너의 얼굴을 볼 일이 없으리…….
전쟁은 거대한 상황들로 나를 끌어당기고 매혹시키지만 해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것이 얼마나 비열하고 사악한 무지와 야만인지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중략) 그가 항상 전쟁에만 골몰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포연이 가시고 나면 그는 필요할 경우 군축에 나서는 등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에도 전념했다. 하원에 입성한 첫 1주일 동안 그는 전쟁성의 잘못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실제로 그는 고위 장성들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명확한 방어적, 외교적 목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군사적 수단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1909년에 맨체스터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제가 과시적이고 선동적인 군비 확장 정책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1920년대 말에 재무성 장관으로 일할 때는 국방 예산을 지속적으로 삭감했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자 전쟁 대비 태세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반면 대영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전쟁이 임박하면 내재된 관심은 곧바로 과도한 흥분으로 끓어올랐다. 그는 군사적 문제를 분석하는 일을 즐겼기 때문에 군사 작전이 진행되는 여건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고위 장성들이 시기가 부적절하거나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조언과 질의를 서슴지 않았다(물론 군사 역사가들이 때로 속단하는 것처럼 고위 장성들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 pp.36~38

격동의 시기, 격정적 삶을 펼치다
그는 언제나 쉼 없이 열정을 쏟았고, 출처에 상관없이 쓸모 있는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차용하는 태도로 새로운 역할에 전념했다. 또한 그는 사회적 관심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취했던 입장을 공유했다. 그것은 독일의 광범위한 사회 보장 체제를 영국에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애스퀴스에게 보낸 특유의 길고 사념적인 편지에서 “독일은 우리보다 여건이 나쁘고 축적된 부도 적지만 국민이 견딜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여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전쟁뿐만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도 잘 조직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정당 정치 말고는 조직된 구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라고 썼다.
상무성은 식민성보다 그에게 훨씬 더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조직의 수장이 되었고, 유능한 사무차관인 허버트 루엘린 스미스와도 호흡이 잘 맞았다. 그는 상무성 장관으로 재직한 20개월 동안 직업소개소 설립, 실업 보험 도입, 임금 위원회 구성을 위한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빈곤과 실업에 맞선 전쟁’에서 독일을 앞지르려는 웅대한 포부에 비추어 보면 미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 후에 영국을 복지 국가로 만드는 선구적인 조치였다. 그런 점에서 처칠의 자문단에 젊은 윌리엄 베버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더없이 적절한 일이었다. (중략)
지식인들 역시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그의 연설에 매료되었다. 그의 연설문은 나중에 『자유주의와 사회 문제』와 『민권』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캐너다인은 1909년 12월 17일에 빅토리아 오페라 하우스에서 했던 연설을 언급하며 “처칠은 하원에서 했던 형식적이고 화려한 연설을 유세 현장에 맞게 역동적인 내용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연설문은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한 예로 상원에 대한 그의 연설 내용을 보자.

저는 랭커셔에서 유세할 때 보수 진영의 연설자들에게 누구든 앞으로 나와서 왜 상원이 우리를 다스리고, 왜 상원 의원의 자녀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다스릴 권리를 가져야 하는지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환호). 저의 도전에 용감하게도(웃음) 커즌 경(야유)이 나섰습니다. 상원은 그보다 유능하고 오만한 변호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그는 영국에는 대대로 법을 제정하는 일을 하는 상위 계층이 있어야 하며, 입법권은 당분간(웃음) 상원 의원의 인격이나 지성, 혹은 경험과 관계없이 대중의 필요와 의지로부터 독립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커즌 경의 세 번째 주장은 모든 문명은 귀족 정치의 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실은 귀족 정치가 모든 대중의 힘겨운 노동으로 유지된 것이라고 해야겠지요(환호). --- pp.59~61

다르다넬스 원정, 그 사실과 진실
다르다넬스 원정은 너무나 부실하게 진행되었지만 절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다만 모든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을 뿐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상륙 병력이 방어선을 뚫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했다. 전투에서 일부 유리했던 순간은 방어선 돌파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둘째, 상륙 시기가 빠를수록 독일의 지휘관이 방어선을 강화하고 터키군을 재무장시킬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었다. 이 점은 시간이 갈수록 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나 방어선이 절대 무적은 아니었다. 셋째, 훌륭한 지휘관들이 있어야 했다. 앤잭군의 경우 일부 지휘관의 능력은 형편없었으나 총사령관인 이언 해밀턴은 당시 영국군의 문화를 무시하고 그들을 가차없이 교체할 인물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처칠의 역할은 비판받을 여지가 거의 없다. 그가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수륙 양동 작전’은 애초에 전쟁 위원회에서 수립했던 것으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실행에 옮길수록 더 나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생각했던 유일한 계획은 아니었다. (중략) 다르다넬스 원정에서 처칠이 차지하는 역할은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에서 그의 인기와 권위는 빠르게 추락했다. 외곽 요새에 대한 폭격으로 호기롭게 시작한 첫 번째 단계는 1차 목표에 대한 대규모 공격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중략)
상대적으로 파란이 적었던 두 번째 단계는 대대적인 작전이 전개된 4월 25일에 끝났다. 이 날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앤잭의 날로 기억되며 ‘전체 세계 대전에서 가장 극적인 날’로 평가받는다. 이 날 프랑스군과 영국군, 앤잭군으로 구성된 해밀턴 원정군의 선봉대가 갈리폴리 반도의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용맹하게 싸웠지만 끝내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결국 연말에 키치너는 돌파를 포기했다. 그나마 육해군의 협력이 잘 이루어졌던 철수가 작전에서 가장 성공적인 부분이어서 25년 후 케르크의 경우처럼 일종의 승리로 치부되었다. (중략)
갈리폴리에서의 패배를 통해 틀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터키군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했다 해서 처칠을 비판할 수는 없다. 1914년 가을에 발생한 몇 가지 사건은 그러한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이 오판은 비슷한 경우로 1942년 초에 재난을 초래한 일본군에 대한 오판보다 변명의 여지가 많다. 또한 민간의 트롤 어선들이 나섰던 기뢰 제거 작업이 얼마나 부실한지 파악하지 못한 잘못도 그만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했던 독일군의 대포와 매우 다른 저궤도의 해군 대포로 터키의 요새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다 회의적으로 평가했어야 했다. 또한 그는 해군의 역량을 과신했고 지나치게 지휘관들의 작전 수행에 간섭했다. 그의 끝없는 간섭은 이미 능력이 부족한 카덴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웠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전투를 치르기 전에는 카덴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알 길이 없었다. 처칠은 단지 다른 책임자들과 달리 기꺼이 위험 부담을 감수하려 했을 뿐이었다. --- pp.100~105

타도 볼셰비즘, 평화 아일랜드
처칠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에 내전이 터졌을 때 영국이 반혁명군인 ‘백군’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은 호응을 얻었다. 연합국의 주류 세력은 10월 혁명에 이은 볼셰비키의 성장에 반감을 가졌다. 연합국으로서는 자신들을 곤경에 빠트렸던 러시아가 설상가상으로 혁명까지 전염시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미 독일과 헝가리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노동 운동이 벌어진 모든 국가에서는 러시아의 변화를 따르고자 하는 혁명가들이 활동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에 공산당이 설립되기 전부터 강경한 비공산주의 계열의 노조와 노동당은 러시아에 개입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보수당과 자유당은 모두 처칠이 주장한 용어인 볼셰비즘을 싫어했지만 최고위층 인사들 중 그 누구도 처칠만큼 공개적으로 반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흥분했던 것만큼 러시아 혁명에 흥분하면서 과민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어 그는 『세계의 위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여파』에서 러시아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거대한 땅 러시아, 상처 입었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러시아, 오염된 러시아, 전염병에 걸린 러시아, 사람을 죽이는 발진티푸스를 지닌 해충을 몰고 다니는 무장한 유목민들이 총검과 대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건강과 영혼까지 파괴하는 정치사상을 가진 땅.

(중략)그는 볼셰비즘이 러시아인들에게 비극을 안길 것이며 공산주의 정권이 독재 체제로 변질될 것임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는 내각과 위원회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행한 연설과 신문에 실은 글을 통해 꾸준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리고 1919년과 1920년 초에 걸쳐서 ‘적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백군’을 군사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또한 그는 1919년 전반기 내내 반소비에트 연합에 화해와 재무장을 거친 독일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의 태도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나 공산주의가 러시아를 지배하던 끔찍한 시기가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처칠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 pp.142~144

12월 16일에 했던 그의 연설은 온갖 기교와 정치인으로서의 지혜, 그리고 인간적 정서로 가득 차 있어서 위대한 정치 연설의 반열에 오를 만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일랜드가 협상안을 놓고 분열하는 것에 안타까워했고 갈등이 내전으로 번진 후에는 독립파가 승리하여 공화국이 선포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영국은 국가 안보를 위하여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너그러운 아일랜드인들이 현실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문제 때문에, 그들이 압제자로 모는 영국인뿐만 아니라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칠은 헨리 윌슨 육군 원수가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두 명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후 당분간 몸조심을 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결코 그리피스와 콜린스, 그리고 그들의 임시 정부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고 결국 그 믿음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그리피스와 콜린스,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가 그에 대해 가진 믿음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행복한 결말로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p.150~151

왕성한 저술, 히틀러에 맞서다
독재자 히틀러의 주도 아래 군국적 민족주의가 부활하자 처칠은 1934년부터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 두고 베를린을 예의 주시했다. 특히 1936년 5월에 히틀러가 라인란트의 비무장 지대를 재점령한 후 독일의 힘과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중략)
그는 신문과 의회, 대중 집회, 방송에서 독일이 조약을 어기고 재무장에 나섰으며 영국이 거기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례 중에서 1934년 11월 16일에 했던 라디오 방송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소수자와 반대파를 억압하는 나치를 비판하고, 군축이 히틀러의 야욕을 부추길 뿐이라고 지적한 후 이렇게 말했다.

대영 제국을 향해 다가오는 일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던 선조들처럼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준비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강한 나라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삶을 지킬 준비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는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도록”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같은 의지를 가진 나라와 연합하여 저항하기 위해 재무장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국제 연맹이 그러한 연합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pp.223~225

최고의 시간을 살다
처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고 다른 사람들의 몸도 아끼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늦도록 잠을 자지 않고 음주와 흡연을 삼가지 않는 60대 후반의 처칠이 덜 열심히 일했더라도 사람들은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는 여러 업무를 번갈아 하면서 최대한 많이 일하고, 왕족이나 귀빈을 만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틈날 때마다 토막잠을 잤다. 또한 오후 2시든 새벽 2시든 가리지 않고 보좌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시간이 언제든 자신의 말을 받아 적을 사람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휴일에도 전시 내각을 소집했고, 새벽 1시 45분에 보좌관들을 모으기도 했다. 그에게 공휴일은 평화 시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에게 공휴일을 원하면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말했다. 그는 만찬을 겸한 회의를 위해 교외에 있는 수상 관저로 참모 총장들을 부르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편의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종종 다른 사람의 감정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본 사람이라면 냉담한 히긴스 교수의 모습을 보고 그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아랫사람들은 기꺼이 그와 함께 일했고 그 경험을 자랑스럽게 회고했으며 그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 pp.255~256

민주적 전쟁 지도자가 되다
그의 연설은 영국을 세계 무대에서 그 어떤 나라도 오르지 못했던 인류의 가치를 지키는 위치로 올려놓았다. 영국의 생존은 단지 한 국가만이 아닌 문명과 자유의 생존을 의미했다. 2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던 1940년 6월 17일의 연설에서 그는 프랑스가 항복한 사실을 전하면서 “이제 우리는 전 세계를 위해 정의를 지키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 우리는 인류를 덮친 히틀러의 저주가 사라질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국민은 그의 연설을 듣고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는커녕 매우 신성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공습을 당하는 상황에서 모든 국민은 사실상 전장에 나와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모두 참전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중략)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 영국인들은 용맹하고 가치 있는 국민과 국가(그리고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단어인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중략)
그의 연설은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위험을 감추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수상으로서 했던 첫 연설에서 “땀과 눈물, 그리고 피”를 바치자는 전형적인 표현을 쓰면서 “아주 오랜 고난과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때는 그나마 아직 프랑스가 항복하기 전이었다. 그는 케르크 철수에 대해 6월 4일에 했던 연설에서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일어난 일이 엄청난 군사적 재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10월 8일에 했던 하원 연설에서도 “국민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회피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영국 본토에서 벌어진 전투는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은 거기에 대한 그의 연설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몇 개월 전보다 상황에 익숙해졌고 고난과 어려움을 앞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과 친구를 포함한 외국 국가들은 끈질기게 버티는 대영 제국의 거대한 힘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우리가 직면한 끔찍한 위험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흔들림 없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독일에 맞선 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 얼마나 멀리 퍼질지,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 죽음과 슬픔이 우리의 여정을 따라다닐 것이고 고난은 우리의 옷이 될 것이며 끈기와 용기는 우리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 우리의 능력과 업적은 진정한 구원의 횃불로 타오를 때까지 유럽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연설이 지닌 힘은 장엄한 표현에 힘입은 강한 개성에서 나온다. 당시에는 학교나 교회, 혹은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성경을 인용한 문학적인 표현을 접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덜 생소해 보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특별한 표현은 특별한 상황에 잘 맞았다. 연극적인 연설법과 개성적인 목소리는 그의 연설을 보다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어둡고 고통스런 내용은 밝고 긍정적인 내용과 격조 있는 균형을 이루었다. (중략)
그는 라디오 연설로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직접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국내외의 수많은 곳을 방문했다. 그는 직접 가서 보기를 원했고, 멈춰 서서 대화한 적은 드물었지만 군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적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였다. 전쟁이 시작된 후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연설을 맡긴 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탈린도 당을 주로 앞세웠다. 반면 사진 기자를 몰고 다닌 처칠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외부에서 모습을 보였다. 대공습과 본토 공격의 위협에 시달린 시기에 그의 방문은 국민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언론의 수행 여부에 상관없이 해협을 따라 배치된 진지와 요새를 두루 방문했다. 그는 군인이나 국민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경험을 나누려고 애썼다. 그래서 런던이 공습을 당하던 시기에 종종 피해 지?을 찾아가 생존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 pp.266~271

반드시 ‘오늘’ 시행하라
처칠의 밑에서 일했던 일부 인사들은 정상적인 날의 근무 풍경을 묘사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있을 때는 정상적인 날이 없긴 했지만(한 비서는 일기에 “수상이 자리를 비우면 부자연스런 고요가 감돌았다.”라고 썼다)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지도실의 일일 보고서가 들어오는 8시에 깨어 있어야 했다. 그는 전쟁 초기에는 하루 한 번 이상, 그 후로는 1주일에 두 번씩 회의를 열었던 전시 내각이나 불가피하게 참석해야 하는 위원회로 출근할 때까지 비서와 보좌관을 곁에 두고 침대에서 업무를 보았다. (중략) 처칠은 침대에서 나오면 목욕을 마친 후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주로 원하는 사람과 전쟁 관련 논의를 하는 기회로 활용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대개 모든 관계 부처가 모여서 판저 탱크나 유보트 대응 방안처럼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특별 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과가 어떻든 간에 그는 오후나 이른 저녁에 한 시간 정도 잠을 잤다. 베개에 머리를 눕히는 순간 숙면을 취하는 그의 능력은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단잠을 자고 나면 활력을 되찾은 거인처럼 새벽까지 일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낮잠과 목욕을 빠트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점심과 저녁 사이에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은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저녁은 8시 무렵에 좋은 와인이나 샴페인을 곁들여서 방문자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푸짐하게 먹었다. 그리고 10시나 주말에 영화를 볼 경우에는 더 늦은 시간에 다시 일을 했다. 대체로 그는 국방 위원회 같은 직속 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하거나 원하는 사람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말을 정리하는 힘든 일을 맡은 타자수들은 주야로 교대 근무를 했다. 그 중 한 명이 말한 “심야의 바보짓”은 야간 근무의 고정적인 명칭이 되었다. 그는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었다.
(중략) 처칠은 새벽 2시에 피로로 지친 상태에서도 문득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비서를 불러서 제국 합참 의장에게 말할 내용이나 프랑스 국민을 대상으로 할 연설의 초안, 혹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낼 서신을 구술했다. 그의 기운과 의지는 한계를 가늠할 수 없었고 집중력은 전쟁 막바지까지 약해지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항상 힘들어했지만 결국 그를 돕는 일은 일종의 병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처럼 뛰어난 리더를 돕는 일은 부담이 아니라 특혜였고, 그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은 천재에게 바치는 경의였다. (중략)
수많은 아이디어와 함께 그의 독특한 국정 운영 방식을 보여 주는 업무 서신도 매일 쏟아져 나왔다. 오랫동안 업무 서신은 정부에서 선호하는 부처 내 혹은 부처 간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대개 각 부처는 추가 자료를 모으거나 주석을 달면서 느리게 업무 서신을 작성했다. 처칠은 그 속도를 엄청나게 높였다. 그는 집무실에 도착한 후 몇 시간 만에 “금일 시행”이 대문자로 적힌 문서들을 수없이 쏟아 냈다. “1주일 후 경과보고”나 “사흘 후 경과보고” 같은 문구가 적힌 문서들도 있었다. 보다 강제적인 업무 서신의 경우 “바람”이라는 온화한 명령을 자주 넣었기 때문에 ‘기원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가령 “조사 바람”, “내일까지 완료 바람” 같은 식이었다. 그는 업무 지연이나 장황하고 논지가 불명확한 문서를 나치만큼 싫어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내용이라도 한 장이나 반 장, 혹은 그 이하로 핵심을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시간에 쫓기는 수상이 필요한 정보를 파악한 후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장문의 문서를 쓰던 관료들에게는 불편한 원칙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착되었다. 그 결과 문서가 정부 부처 사이를 오가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 pp.278~281

처칠의 빛나는 야유 ‘철의 장막’
처칠 가족은 워싱턴에서 트루먼을 만나 같이 대통령 열차를 타고 미주리로 향했다. 여행 도중에 그는 트루먼에게 연설 원고를 보여 주었다. 트루먼이 원고를 전부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파장을 일으키겠지만 좋은 내용이라고 말했다. 파장을 일으킨 부분은 중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발트 해 연안의 스테틴에서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드리웠습니다. 그 뒤로 유럽 중부와 동부에 있는 오랜 나라의 모든 수도들이 있습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비엔나,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 이 모든 유명한 도시와 거기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으며,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처칠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45년에 클레먼타인에게 보낸 ?지에서 같은 표현을 쓴 적이 있었다. 어쨌든 이 강렬한 표현은 즉시 보편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연설을 도발적으로 만든 것은 그 내용이었다. 소련과 전 세계 공산당의 지도부, 그 당원과 지지자들, 그리고 행진과 시위에 참여했던 순진파들은 공산주의가 대서양 헌장과 유엔 헌장에 명시된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는 처칠의 주장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중략)
처칠은 풀턴 연설 이후에도 3월 20일에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같은 기조의 연설을 했다. 그는 아예 자신의 주장에 인간적인 의미까지 부여했다. 가령 뉴욕 시장이 윌도프 애스토리아 호텔에서 주최한 환영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말한 내용이 주목받은 것은 자유를 사랑하고 폭정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러시아가 친구로서 번영하고 국제기구에서 명예로운 위치를 얻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러시아가 그 어떤 국가보다 심한 시련을 겪고도 살아남아 승리를 거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어권 국민이 러시아인들에게 깊은 연민을 품고 있습니다. …… 소련 정부가 이러한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의 것입니다.
--- pp.397~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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