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술은 아니지만 사양 말고 한껏 드시게-이규보
시골로 돌아가는 동년 노생을 보내며 送同年盧生還田居序
이번에 그대가 고생스럽게 다시 도성 땅을 밟았기에, 나는 그대가 지난날의 뜻을 잊지 못하고 벼슬을 구하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도성에 머문 지 며칠도 안 되어 나를 찾아와 떠나겠다고 하였지. 그제야 그대를 과소평가했던 것을 크게 뉘우치게 되었네. 다시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그 고상한 기풍氣風에 경의를 표하고자 하네.
아, 인생사의 부침浮沈은 한바탕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도 곧 벼슬을 버리고 웃으면서 번잡한 세상을 떠날 것이네. 세상일에 골몰하다 끝끝내 청산 백운 속에 노니는 사람이 못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벼슬살이하고 그대는 은거하는 처지라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하기 어려우니, 좋은 술은 아니지만 사양 말고 한껏 드시게. 날씨는 청명하고 새들은 재잘거려 함께 노닐까 하는데, 그대는 차마 나를 버리고 남쪽으로 가려는가?
고려 후기의 문인 학자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노 동년盧同年에게 준 글이다. 노 동년에게 이규보는 마음에 맞지 않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자신도 그를 이해하게 되었고 경의를 표하게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벼슬을 구하지 않고 다시 낙향하는 그에게 ‘고상한 기풍’을 지녔다고 추어올리며 도리어 부럽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규보의 이 말은 노 동년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의 진심이었을까? 이규보의 신세타령을 들은 노 동년은 위로를 받았을까, 내심 ‘속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을까?
많은 직장인들이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장을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러면서 그저 먼 훗날의 귀농歸農이나 귀향을 꿈꾼다. 생존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하고, 그런 정도는 아니라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1장「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대에게」중에서
득실과 이해를 편안히 받아들이게-이숭인
남원으로 부임하는 이 시어사를 보내며 送李侍史知南原序
이군이 처음 감찰監察로 들어와서는 이름난 어사御史가 되었고, 중간에 임주林州 충청도 임천林川를 맡아서는 어진 수령이 되었으며, 또 안렴사按廉使가 되었을 때는 한 도道가 혜택을 입었다. 이군의 재주는 베풀면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써도 써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군이 남원을 다스린다면 능숙한 솜씨로 여유롭게 다스림을 펼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지방관을 가리키는 ‘순리循吏’라는 말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뒷날 남쪽 지방의 수령 중에 정령政令을 줄이고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그 땅을 편하게 여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그 수령은 틀림없이 이군일 것이다. 그의 처신이 올바른 것을 찬미하고 또 다스림이 효과를 거두도록 권면하였으니, 이는 붕우 사이에 간곡하게 일러 주는 도리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이 남원으로 부임하는 이이李?에게 준 글이다.
이이는 벼슬길에 나온 지 10년이 다 되도록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1371년에야 사헌부 시어사에 발탁되었다. 이해에 공민왕은 그간 국정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신돈辛旽을 제거하고 그 추종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 시기에 이이가 등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달 만에 그를 다시 남원 부사로 내보냈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조정의 개혁 분위기 속에서 발탁한 사람을 몇 달 만에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정상적인 조처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당사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이는 좌천이라고 할 만한 인사 조처에도 불만스러운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그는 자신을 절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살이가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고, 업무와 관련된 실수로 징계를 받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로서 억울하고 화가 난다 해도 사안마다 나서서 해명하여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이가 진정한 군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숭인은 바로 그런 점을 두고 그가 틀림없이 어진 수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2장「지방관으로 나가는 그대에게」중에서
그대를 만난 뒤엔 마음이 뿌듯해졌었네-이이
중국으로 사행을 떠나는 윤자고를 보내며 送尹子固根壽朝天序
선비에게는 세 부류의 벗이 있다. 시문으로 서로 어울려 즐기는 벗은 문우文友이고, 벼슬길에서 서로 이끌어 주는 벗은 환우宦右이고, 성리학을 함께 연구하는 벗은 도우道友이다. 벗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무엇으로 벗이 되는지는 같지 않다. ……
나와 자고子固 윤근수尹根壽의 자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으니, 우리의 교우 관계는 반드시 세 가지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상한 것은, 서로 만나는 일이 매우 드물지만 만나면 서로 속마음을 환히 알고, 서로 권면하는 말이 세속 사람들이 하는 말과 다른데도 만난 뒤에는 뭔가를 얻은 듯한 뿌듯한 감정이 든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의 교제는 시문이나 벼슬과 관련된 만남은 아닌 듯하다. 지금 자고가 부사副使가 되어 중국으로 떠나면서 한마디 해 주기를 요청하니, 감히 글을 지어 주지 않을 수 없다. ……
나는 학문이 향상되지 않고 뜻이 날로 예전만 못해지고 있어, 자고가 내게 바라는 바를 저버리고 말 것 같다. 그래서 자고가 중화中華의 문물을 보고 돌아와서 내가 외우畏友의 덕을 더욱 많이 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자고는 힘쓸지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명나라로 가는 친구 윤근수1537~1616에게 준 글이다.
이이는 윤근수와 자신의 관계를 ‘도우’라고 규정하였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듣기 좋은 칭찬보다 충고나 권면을 중시하며, 만나고 나면 뿌듯해지는 친구로 본 것이다. 둘 사이의 교제를 설명한 대목은 윤근수만이 아니라 이이까지도 돋보이게 한다. 그의 올곧은 성품과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이가 글의 말미에 붙인 당부는 사행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담을 자신과 공유하자는 것이다. 학문에 진전이 없고 목표가 점점 낮아지는 자신에게 자극을 주고 동기 부여를 해 달라는 말은, 진정 도를 함께 강마하는 벗에게나 바랄 만한 것이다. 더 이상 인사치레에 가까운 칭찬 따위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진정성이 담긴 글을 노자로 받아 든 윤근수가 느꼈을 뿌듯함과 든든함이 부럽기만 하다.
---「3장「사신으로 나가는 그대에게」중에서
내 아들도 살아 있다면 함께 떠났을 텐데-김창협
풍악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이위를 보내며 送李瑋游楓嶽序
이렇게 나는 금강산을 두 번이나 갔지만 모두 아쉬움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에 늘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면 말을 타고 동쪽으로 향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런 마음은 늙고 병이 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병이 더욱 심해져서 방 안에 들어앉아 지내는 신세인데, 이생李生 백온伯溫 이위李瑋의 자이 찾아와서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이전에 지녔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불현듯 되살아났다. 하지만 힘이 따라 줄 턱이 없다. 늙고 병드는 것은 정상적인 이치일 뿐이니, 탄식해 무엇하겠는가?
다만 죽은 내 아들이 살아 있을 적에 산수 유람을 유난히 좋아하여 금강산에도 한 번 갔었으니, 아마도 그 아이가 나보다 여한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그 아이가 평소 교제하던 벗들 중에서 백온만큼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 없어 함께 오대五大 명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살아 있다면 필시 복건幅巾 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설 것이요, 백온 혼자 떠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은 늙고 병든 사람이 기운을 내기 어려운 것에다 비할 정도가 아니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의 학자 김창협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이위1676~1727에게 준 글이다.
이위는 김창협의 문인이자 그의 맏아들인 김숭겸金崇謙 1682~1700의 벗이었다. 김숭겸은 부친과 숙부 김창흡金昌翕에게서 수학하여 학문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19세로 요절하였다.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금강산, 천마산 등 명산을 유람하였다고 한다.
제자 이위가 김창협에게 금강산 유람을 떠나겠다고 인사를 하러 왔다. 김창협은 지난날 두 차례 금강산을 유람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곳의 절경을 두루 둘러보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며 아쉬워하였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따라나설 기력도 없지만, 늙고 병드는 건 자연의 이치임을 알기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길을 나설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열아홉 나이로 요절한 맏아들이 떠오른 것이다. 김숭겸은 유난히 산수를 좋아하였고 금강산 유람도 한 차례 다녀왔었다. 그리고 이번에 길을 떠나는 이위와 금강산 유람을 함께 하자고 약속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 아들은 죽고 이위 혼자 금강산 유람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살아 있다면 이위와 함께 금강산의 명승지마다 발자취를 남길 텐데, 이젠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김창협은 슬픈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을 듯하다.
---「4장「유람을 떠나는 그대에게」중에서
한 손으로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환란을 막고자 했네-정제두
영암으로 귀양 가는 이중보를 보내며 送李仲輔謫靈巖序
다만 고생스러운 상황에서 심지가 흔들리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에 인내심을 기르고 심성을 단련하여 능하지 못한 것에 더욱 힘을 기울이고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여 깊은 경지에 다다르도록 하는 것, 중보가 여기에 힘을 쓸 수 있을지는 내가 알지 못하겠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이러한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지금 중보가 과연 이런 고난을 통해서 성숙해진다면 그가 이루는 바가 오늘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문충공의 성대한 덕업과 공렬功烈을 그 또한 대를 이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칭송만 하고 충고가 없는 것은 옛사람들이 글을 지어 주던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중보에게 답하고, 아울러 동문수학한 우리들의 부끄러운 마음을 보인다. 지금 중보의 뜻이 연원이 있는 것임을 알았으니, 곤경에 처하게 된 그에게 어찌 그 증조부와 같은 공을 쌓기를 독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 정제두가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 가는 벗 이세필1642~1718에게 준 글이다. 이세필은 선조와 광해군 때의 명신인 백사 이항복의 증손으로, 정제두와는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다.
이항복은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폐모론을 목숨 걸고 반대했었는데, 지금 이세필은 예송에 휘말려 덕원으로 유배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암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제두는 이세필 가문의 내력을 기술함으로써, 이세필이 그 증조부 이항복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인물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이세필의 행동은 과연 타당하고 적절한 것이었을까? 이항복이 폐모론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반대하고 나선 것처럼 이세필이 예송 문제와 관련하여 상소를 올린 것도 그만한 대의명분을 갖춘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세필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위험을 무릅쓰고 소신대로 행동한 점은 그 선조 문충공 이항복을 닮았다고 할 만하다.
정제두는 이세필에게 마음이 괴로울 때에 인내심을 기르고 학문에 힘써서 문충공을 이어 성대한 덕업과 공렬을 이루도록 독려하였다.
---「5장「길 떠나는 그대에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