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우리가 아는 문학은 어떤 상태에 놓일까? 특히 문학의 중심적 형식인 소설은 어떤 모습을 할까? 그렇게 다중지각 예술 형식들이 융성하는 먼 미래에선 소설은 아마도 ‘박물관 예술’이 될 것이다. 소수의 애호가들이 즐기고 연구하지만, 대중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연히 필요한 시장을 확보하거나 뛰어난 재능들을 끌어올 만한 활력을 지니지 못한 예술 형식이 되었으리란 얘기다. 〔……〕
이런 전망은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과 문학을 아끼는 이들을 적잖이 서글프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술 자체이지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의 모습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막 시작된 3천 년기에도 예술은 융성하리라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들과 사회환경이 나타나면서, 묵은 예술 형식들은 쇠퇴하고 새로운 예술 형식들이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예술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기라는 사실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이야기는 영원하다. --- 「이야기는 영원하다」 중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아주 작은 것”일 수밖에 없다. 문학작품을 읽고서 투표에서 선택을 바꾸는 사람들은 드물고, 문학작품의 구입이 가계의 지출 항목 앞쪽에 놓이는 집안은 없다. 작가에게 문학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오든의 탄식처럼, 현실에서 예술은 “사소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문학작품들을 찾는다. 그들이 찾는 것은 앞에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머리띠를 두른 문학이 아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이야기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자신의 이야기가 되도록 보편적이기를, 그래서 진실의 알맹이들을 많이 품기를, 덕분에 재미가 크기를 바라면서. 그것만이 문학이 궁극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중에서
무릇 사물은 바탕이 넓어야 높이 쌓을 수 있다. 우리 작가들이 눈길을 밖으로 돌리고 보편성을 추구해서 우리 문학의 바탕이 넓어질수록, 우리 문학은 풍요로워지고 번창할 것이다. 우리 문학을 척박하고 사소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은 우리 문학의 바탕을 좁히는 것이다. 문화든 언어든, 국적을 따지고 눈길을 안으로 돌리는 것보다 활기를 앗는 처방은 없다.
우리 문학의 바탕을 넓히려면,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우리 문학에 질곡으로 작용한 두 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이 긴요하다. 하나는 한국 문학의 범위가 한국의 국경이라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장벽이 한국어를 지키는 기능을 수행하며 필요한 정보들과 지식들은 번역과 통역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세계성의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이런 미망에서 벗어나야, 우리 문학은 활기를 얻고 잠재적 능력을 한껏 펼쳐서 사람들의 넋들을 자유롭게 하는 자신의 소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 「세계성 시대의 한국 문학」 중에서
책과 문학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세상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문학은 오히려 중요해진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1989년에 이리나 라투신스카야가 한 말은 우리에게 그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러시아 문학은 내 영혼을 구해주었습니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였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물었을 때, 그 부패한 체제에 속한 누구도 나에게 그 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얘기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압제적이었던 시기보다 훨씬 너른 세상에 적용될 것이다. 인류 사회엔 늘 압제와 부패가 있을 터이다. 그리고 문학은 늘 할 일이 있을 터이다. --- 「왜 사람들은 소설을 읽지 않는가」 중에서
예술은 그렇게 두려움에 질린 마음의 원시적 부분들을, 즉 수성獸性을, 대변한다. 갑자기 나타나서 빠르게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인성人性과 그것을 두려워하고 시기하는 수성이 맞설 때, 예술은 선뜻 수성의 편을 든다. 사람의 활동들 가운데 학문과 기술에선 인성이 큰 몫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예술은 사람 전체를 드러내므로, 우리 성품 속에 있는 수성이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학문이나 기술에서보다 훨씬 큰 목청을 얻는다. 〔……〕 바로 여기에 예술의 중요성이 있다. 예술은 사람의 삶에서 지성과 과학이 지닌 압도적 우위에 맞서 감정과 원시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짐승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현상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달리 말하면, 예술은 사람이 자신의 인성에 너무 주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그러나 예술이 그런 기능만을 수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술이 사람 속의 수성과 인성을 조화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술이 지향하는 ‘되도록 높은 차원의 질서’에 보다 가까이 가는 길이다.
--- 「수성獸性의 옹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