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콘신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들고 미국 땅을 밟았지만 나는 위스콘신 주는 가보지도 못한 채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그리고 청소부와 주유소 종업원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전산국에서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출발해, 프로그래머로 미국인들이 10년 이상 걸린다는 매니저 직급의 작업조정관까지 3년 만에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그 뒤 ‘유리천장(여성이나 소수계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 막는 회사 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말)’에 회의를 느껴, 한국인 최초로 매니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 나와 말똥 냄새 나던 세리토스 시에 한국인 최초의 부동산회사를 세웠다. 내가 내건 ‘LA의 베드룸 세리토스’라는 구호는 세리토스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 p.15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일요판에 나오는 구인광고를 보고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오퍼레이터로, 아내는 키펀치 오퍼레이터로 직장을 찾아다녔다. 영어를 잘 못해서 전화로 미리 약속을 하고 가는 식이 아니라 광고에 주소가 있는 곳만 골라 지도를 보고 무조건 찾아갔다. 처음에는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금방 취직이 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곧 미국인들의 몸에 밴 친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다녀 보아도 대게 미국에서 쌓은 경력과 학력만 물어보고는 제대로 인터뷰를 해주지 않았다. --- p.83
회사가 제법 규모를 갖추고 활기차게 돌아가던 1980년 4월이었다. KBS에서 취재팀이 찾아왔다.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나를 소개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내가 ‘세계 속의 한국인’ 1호로 선정된 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는 한인사회를 대표할 다른 사업체나 인물이 없던 시기라, 100만 달러 상당의 재산을 모았으며 많은 한국인 직원들이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 부동산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내가 그나마 적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 p.108
종합주간 신문 '코리안스트릿저널'은 한인사회의 문제점, 한인타운의 현실과 미래상 등 기획연재와 한흑관계, 노동문제, 민권운동 등을 심도 있게 다룬 특집기사들로 독자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한인언론이 비판의 성역으로 여겼던 한국의 정치상황, 총영사관, 언론, 기독교계에 대한 비판과 반전·반핵·평화운동, 한반도 핵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도 성역 없이 다루었다. 이렇다 보니 스트릿저널의 기사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 p.121
안기부와 총영사관의 공작으로 나는 한인사회의 여러 단체와 동창회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는 가깝게 지내던 친지나 이웃과도 점차 멀어졌다. 친구들과 동문들이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간혹 시비를 거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슬프고 황당했던 것은 모임에서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였다. --- p.126
1987년 6월 21일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내 서울국제공원에는 정오부터 수많은 동포들이 태극기, 현수막, 구호판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날 참여한 동포는 대략 7,000여 명으로 1992년 4·29폭동이 일어나기까지 최대 인파가 몰린 것이었다. 한인 언론은 물론 미국 언론의 취재 기자들까지 몰려들었는데 동원된 카메라만 13대였으며, 행사 이후 일주일 내내 TV에서 이날의 뜨거운 열기가 보도되었다. 조직력 없이 단지 신문과 방송 홍보만으로 이처럼 많은 인파가 자발적으로 모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당시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 pp.126-127
북한이 미주동포연합의 결성을 추진하면서 미주 한인사회는 양분되었다. 나는 남과 북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남북 화해를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하는 통일운동을 지향했다. 그러나 남과 북 양쪽은 모두 자기네 깃발을 들고 따라올 것을 요구했다. 미주 통일운동권은 해외운동으로서의 독자성은 찾아볼 수 없었고, 조직구성원의 의사보다는 북한의 조평통이나 한국 운동권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지 여부에 의해 조직이 좌우되는 실정이었다. (중략) 나는 남과 북 그리고 한국의 정치권과 운동권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무비판적으로 북한의 조평통이나 한국 운동권의 결정을 추종하는 해외 운동권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 pp197-199
영어의 기초가 없는 내가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선거운동에 영어가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영어에 자신이 없어 전화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유권자들을 찾아다니는 가정방문 위주로 선거운동을 했다. 가정방문을 하다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손전등을 들고 늦은 시간에 다니다 불평을 듣기도 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다. --- p.239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지만 내 의지나 능력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어린 소년의 꿈은 태평양 너머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정치와 담을 쌓고 살기 위해 전공을 컴퓨터로 바꾸고 비정치적인 광고전문지 '주간광고'를 만들었으나 시대적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한가운데 섰다. 이민 1세로서 높은 언어장벽에 눌려 영어가 유창한 젊은 세대의 뒷바라지를 나의 사명으로 생각했으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미 주류사회에서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내 의지대로 인생을 살았다기보다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