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달리 정부가 예술 활동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미국에서도 이 ‘퍼센트 방식’은 착실하게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정부에 의한 예술 보호에 적극적으로 되어, 1960년대 존슨 대통령 시대에 연방정부에 전미예술기금을 설치하고 예술 작품 제작을 보조하거나 전람회를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퍼블릭 아트도 그 대상에 들어 있다.……프랑스에서도 ‘퍼센트 방식’으로 공공건축에 예술 작품을 도입하는 것이 반드시 뛰어난 예술가를 보호하고 격려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실제로 1952년부터 1977년까지 처음 4반세기 동안 이 방식이 실시된 결과를 보면, 이 동안 약 1,500명의 예술가가 그 혜택을 입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 가량은 단 한 차례 주문을 받았고 다섯 번까지 주문을 받은 예술가가 8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에 반해, 전체의 3퍼센트쯤 되는 예술가가 21회 이상, 때로는 30회, 40회나 주문을 받았다. 즉 극소수의 한정된 작가들이 반복해서 공공사업에 선발되는 경향이 분명히 눈에 띄는 것이다. 더구나 그 선발된 예술가들이 미술계에서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반드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다는 점은, 그들에게 종종 ‘1퍼센트 공무원’이라는 얼마간 경멸을 담은 호칭이 붙는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다.
--- pp. 243~246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젊은 예술가들에게, 그들을 이해하는 화상은 큰 역할을 했다. 당초에 중개자 내지 해설자였던 미술평론가가 점차 화가의 옹호자나 협력자로 활동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화상 중에서도 무명의 뛰어난 재능에 기대를 거는 의욕적인 사람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예술 운동의 옹호자로서 자각을 가지고 활동한 최초의 화상은 뒤랑 뤼엘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1869년에 “참된 화상은 또한,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해심 깊은 애호자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 그는 오로지 바르비종파 화가들에게 힘을 쏟고 있었는데, 1870년에 보불전쟁을 피해서 런던에 갔다가 모네를 만난 후로 방향을 크게 바꾸었다. 이듬해에 프랑스로 돌아오자 당장 모네의 작품 두 점을 각각 300프랑씩에 샀고 뒤이어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만년에 뒤랑 뤼엘은 가게의 경영을 자식들에게 넘겼지만 인상파에 대한 애호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 pp. 207~208
다만 그 아카데미가 주재하는 ‘살롱’이라 불리는 공식 전람회는 구체제 시대와 비교할 때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예전의 살롱은 출품자가 아카데미 회원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19세기의 살롱에는 ‘자유?평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외국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이 제도는 파리가 국제적인 예술의 도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토록 널리 일반에게 열려 있던 이 제도는, 역설적이게도,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내용의 획일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응모 작품이 격증함에 따라 살롱은 필연적으로 심사제도라는 관문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살롱은 7월왕정 시대 이래 원칙적으로 매년 개최되고 출품작도 매회 2,000점에서 3,000점 이상에 이르는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와 동시에 출품작의 몇 배나 되는 낙선 작품도 나왔다. 누구라도 출품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그 길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찍이 18세기에는 그뢰즈나 프라고나르처럼 스스로 살롱을 거부하고 시민들 사이에서 이해자를 찾는 화가도 있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자 살롱에 입선하지 않으면 버젓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새로 패트런이 된 신흥 시민들은 자기의 취미 기준을 가지지 못했던 만큼 살롱의 판정을 평가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살롱을 지배하는 아카데미가 큰 사회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사실 이 시대에, 모처럼 살 사람을 만났던 작품이 살롱에 입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거나 젊은 화가가 살롱에 낙선하자 파혼당하거나 하는 에피소드가 종종 있었다.
--- pp. 167~168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1603년 엘 그레코의 세금 지불에 관한 재판 사건이다. 크레타 섬 출신의 이 그리스인 화가는 물론 궁정화가가 아니었지만 그런 만큼 독립한 화가로서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작품에 대한 지불과 관련하여 평생 몇 차례 문제를 일으켰다. 그 첫 번째 사건이 1579년 톨레도 대성당을 위해 그린 명작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의 지불에 관한 분쟁이다. 이러한 주문 제작의 경우 가격은 화가와 주문주 양쪽에서 평가인(대부분의 경우 복수)을 지명하여 각각 평가하게 하고, 그것으로 타협이 되지 않을 때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중재인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방식은 얼른 보아 양쪽의 말을 다 듣는다는 공평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작품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화가는 얼마를 받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작을 해야 하는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레코는 그러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저항을 했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의 경우에도 작품이 완성된 후 관례에 따라 화가와 주문주 양쪽에서 평가인을 지명하고 가격을 판정했다. 그레코 측의 평가인이 내린 결정은 900두카트로, 이것은 그림 한 점의 가격으로는 매우 높은 금액이다. 여기에 대하여 대성당 측의 평가인이 내린 판정은 228두카트, 즉 그레코 측에서 평가한 금액의 거의 4분의 1이었다. 게다가 대성당 측은 작품의 내용에 관하여, 화면 왼쪽 아래 구석에 그려진 세 사람의 마리아는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하는 등 몇 가지 결점도 지적했다. 쌍방의 평가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최종 판결은 중재인에게로 넘어갔다. 그 결과 내려진 판정은 318두카트로, 그레코에게 너무나 불리한 가격이었다. 보통이라면 여기에서 일이 끝났겠지만 그레코는 여기에 승복하지 않고 작품을 넘기기를 거부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레코는 350두카트를 받아냈다. 중재인의 평가보다 조금 높은 금액이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그는 조금이라도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톨레도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는 이 대작의 화면에는 역시 세 사람의 마리아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내용에 관해서도 그레코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했던 셈이다. 주문주와의 이러한 다툼은 그 후에도 몇 차례 반복되었다. 그런데 1603년의 재판은 주문주와의 다툼이 아니라 그레코가 작품의 판매에 대한 세금 지불을 거부한 사건이다. 판매세를 낸다는 것은 그림을 일반적인 상품과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하여 그레코는, 회화는 단순한 ‘손재주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 음악이라든가 수학 등의 ‘자유학예’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판매세 따위가 부과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이래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강조했던 것이 스페인에서는 17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공론화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재판에서는 결국 그레코의 주장이 인정되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것은 그레코 혼자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회화의 지위를 전반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토니오 파로미노는 1724년에 간행된 《회화론》에서, “모든 화가들은 판매세로부터 우리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맨 처음 싸움을 한 그레코에게 꺼지지 않는 감사의 마음을 바쳐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 pp. 116~119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란 미술에 있어서도 개인의 역량이 크게 주목받게 된 시대이며 그런 뜻에서 인간중심주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은 뛰어난 예술가의 역량을 인정하고 평가하여 그 예술가에게 활약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보호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패트런patron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패트런의 등장은 ‘예술가’의 탄생과 안팎을 이룬다.…… 여기에서 말하는 패트런이란 예술 작품의 경제적 물질적 담당자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를 이해하고 작품을 평가하고 예술가에게 지원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2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산물이었다.
--- pp.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