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이른바 야만인들을 주제로 한 문학 연구가 놀라우리만큼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집시, 식인종, 원주민, 늑대 소년, 고귀한 야만인 등등을 내세우고 괴물이나 모르몬교도, 복장 도착자, 털북숭이 아일랜드 원인을 고찰하는 이런 현상은 모두 타자성에 홀딱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탓이다. 투아레그족이 우리가 자기들을 늑대인간이나 매춘부하고 같은 범주로 취급하는 것을 만에 하나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참 궁금하다. 이런 연구들이 이국성을 주제로 삼는 목적이 그런 관념이 제국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러다가는 비평이 공상과학소설의 하위 범주로 추락할 지경이다. --- p.10
아일랜드인이 야만적이라는 이미지를 깨뜨리려고 안달복달하는 어떤 현대 아일랜드 역사가는 빅토리아 중기 아일랜드의 사망 원인 중 두부 부상은 30퍼센트, 특수 상해는 11퍼센트, 자상과 창상은 7퍼센트인 데 견줘 총상은 겨우 45퍼센트라는 사실을 점잖게 지적했다. 아일랜드인들이 이토록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이 역사가는 시골 농부들의 고결한 도덕성을 한층 분명히 입증하려고 ‘두 방 이상 총을 맞은 지주는 거의 없었다’고 덧붙였다. --- p.26
오늘날에는 가장 보잘것없는 남녀라도 비극의 주인공 역을 맡을 수 있다. 이제는 시선을 잡아끌 만한 물보라를 만들려고 꼭 높은 곳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사실 삶은 낮은 곳에 임할수록 더욱 불확실해지고 비극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18세기 문학의 새로운 주인공들이 기사나 귀부인이 아니라 창녀와 고아인 이유 중 하나다. 이런 못 가진 자들에게 각별히 친절하기로 정평이 난 상징적 공간이 교수대다. 이곳에서는 정말이지 개나 소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추락하기 위해 굳이 높이 날아오르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 p.34
포스트모더니즘은 규범이 본래 억압적인 것이라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심지어 우유 주전자에 침을 못 뱉게 하거나 민권법을 제정하는 것조차 가혹한 독재나 다름없다. 규범이란 정상이 아닌 이상 상태로, 우연히 우리의 승인을 얻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모든 이상 상태가 곧 잠재적 규범이니까, 모든 이상 상태 역시 의심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말처럼, 만일 여론 자체가 다수 독재라고 한다면 급진적 여론이라는 말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지식 행상꾼들이 역사 지식을 노상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모더니티의 특수한 사회적 조건에 비춰 보지 못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 p.37
여러 문학 형식 중에서도 유토피아 소설이야말로 가장 자기 파괴적이다. 유토피아라는 것은 불가피하게 현재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지만, 이것을 말로 해 버리면 바로 그 순간 다른 것이 되고 말 위험이 도사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욕망하던 타자성은,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더는 타자가 아니게 된다. 이렇게 현실의 상상력의 척박함에 대항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느새 그 현실을 단순히 재생산하고 마는 것이 바로 유토피아 소설이다. 칸트의 ‘숭고’처럼 정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행위가 도리어 우리 정신의 한계를 상기시키고 만다는 점에서, 모든 유토피아적 글쓰기는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할 만하다. --- p.47
예이츠는 레프리콘들이 고깔모자 꼭대기로 핑그르르 돈다는 이야기를 쓰면서 그것이 마치 학술적인 저술인 양 단서를 달았다. ‘그렇지만 이것은 북동쪽 국가에만 해당한다.’ 예이츠는 여기서 독자, 즉 민속학자들을 놀리는 것일까, 아니면 끊임없이 신화를 만드는 자신의 정신을 조롱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도 놀리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구축한 상징들 속에, 즉 카운티 골웨이의 반쯤 무너진 탑 안에 사는 이 시인은 자신을 별스럽게 신화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독하게 비꼬는 것일까? 이 가식적이면서 정열적인 남자에 관한 물음은 답을 내릴 수 없을 때가 많다. --- p.89
엘리엇은 문학 비평이 모든 사회적, 정치적 또는 신학적 편견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비평자들이 천사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분명히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전선도 없는 언론지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 p.135쪽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탁월한 기량으로 이 임무를 완수했다. 이 책은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기리는 지적 기념비의 최고봉이다.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 철학 저작도 이 책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주체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들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청년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을 재창안했다. 객체의 근원이 주체의 노동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 것이 바로 소외다. 일단 그 무고한 ‘객체’가 실상 물화된 상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근대 서구 인식론의 역사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 p.146
벌린은 디스토피아적 회의주의로 손해 볼 것은 없는 사회 질서를 대변하는 저술가다. 유토피아적 사상은 대체로 아직 변화를 바라는 사회 계층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일단 권력의 안락함에 감싸안기고 나면 세상을 바꾸는 게 우라지게 어렵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완벽에 관한 몽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발명품이 아니라, 이민자인 벌린이 한데 뭉뚱그린, 이전 단계의 중산층 문명의 발명품이다. 초기 진보주의가 없었다면 중산층의 사회 질서는 어쩌면 절대로 성립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아마 벌린 자신이 한몫 낄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만약 어떤 한 모임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면 웬만하면 그 모임이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금방 구명보트에 간신히 기어오른 처지에 그 보트를 개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 p.169
『논리철학논고』의 대부분은 1차 대전 때 참호 안에서 쓰였는데, 그때 비트겐슈타인은 갈수록 더 위험한 곳으로 전출시켜 달라고 요구해 군사 본부를 줄곧 난처하게 만들었다. 죽음이란 것이 무의미한 삶에 약간이나마 의미를 던져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상부에서 그 요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비트겐슈타인은 남은 생을 고질적인 정신적 고문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금욕적, 전제적, 독재적이고 구시대적인 귀족이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무의미하다면서 제자들에게 철학을 포기하라고 들볶기도 했다. --- p.174
확실히 자기희생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삶의 방식은 아니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이라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다. 순교자들, 아니 바른 말로 급진주의자들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한 나라다. 그러나 역사가 그토록 극악하다는 것을 아는 이상, 역사를 바꾸려 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일부 사람들이 남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적어도 일부는 절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예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면뿐 아니라 칸트 같은 면도 지닌 이유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자기희생을 하는 혁명가는, 해방된 미래의 이미지를 보여 주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혁명가는 미래의 표상이 아니라, 미래를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다. --- p.183
옛 레닌주의자들은 이제 라캉주의의 정회원이 되었고, 모두 생산에서 도착으로 관심을 옮겼다.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는 푸코와 폰다의 육체학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현상이 가장 장대한 규모로 벌어진 것은 늘 그렇듯이 미국이었는데, 애초부터 그다지 사회주의에 매혹된 적이 없는 이 나라에서, 좌파는 푸코의 고고한 프랑스식 염세주의를 바탕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마비 상태에 관한 세련된 이론적 해석을 찾았다. 프로이트는 물신주의를 견딜 수 없는 공허를 메우려는 노력으로 보았는데,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가 이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압도적인 물신이 되었다. 버클리에서 브롱크스까지, 이제 강의실에서 가장 섹시한 주제는 섹스 그 자체가 되었고 건강에 관한 염려증은 미국의 국제적 질병으로 등극했다. --- p.203
셰익스피어의 희곡 『앙갚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용서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용서가 정의를 농락하는 방편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비나 용서는 앙갚음이나 가치 교환을 넘어서는 창조적 잉여를 통해 복수라는 악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르샤가 말하듯이, 용서의 특성은 ‘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용서의 무(無)대가성은 또한 그 대상(상품 형식과 마찬가지로)의 가치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자비는 명랑한 무관심의 양상을 취해서는 안 된다. 견뎌 낸 상처의 대가를 측량하고 그 고통을 느낌으로써 그 너그러움의 값을 치러야 한다. --- p.222
많이 알면 아는 만큼 잘난 척을 할 법도 한데, 콘래드의 책에는 각주가 단 한 줄도 달려 있지 않다. 자기 글이 손상될까 염려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자신감만큼은 감탄스럽다. 일부 아방가르드 예술작품과 달리, 이 책은 그 생산 과정에 든 노고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그러나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각주가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독창적 사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더니즘에 관한 콘래드의 보편 개념들은 대다수가 표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 p.233
미국 페미니즘이 대체로 그렇듯이 탈식민주의는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고도 정치적 급진주의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며 ‘탈식민적’ 세계에 각별히 친절한 좌파적 형식이다. 반대로 스피박은 사회주의적 전통에 보내는 신뢰를(비록 그 방식은 좀 애매하지만) 잃지 않는다. 이 책에서 스피박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주목할 만한 인식을 많이 보여 주기는 하지만,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에 너무 깊이 침식되어 있기 때문에 최근 경향에 관한 폭넓은 사회주의적 비판에 착수하지는 못한다. 스피박이 양 세계에 걸쳐 있듯이, 스피박의 저술에서 보이는 조금 피곤하고 연극적이며 자기 암시적인 습성은 식민지의 역설적 자기 상연이자 학문적 냉담함에 가하는 풍자적인 공격인 동시에 익숙하게 보아 온 미국식 자아 숭배이기도 하다. --- p.256
스타이너의 책은 헨리 무어의 조상처럼 즉각 알아볼 수 있다. 폭넓은 박식함, 반들거리게 닦은 고음역의 수사학, 기품 있는 분위기, 장엄한 어조. 스타이너는 심오한 질문, 가끔씩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도 그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한다. ‘15세기 초 카스티유 농민의 평균적 어휘력은 어땠을까?’ 같은 것이 (반쯤 허구적인) 그 예다. 이 빽빽하고 기묘한 연구서의 한 지점에서 스타이너는 ‘오늘날 스타티우스를 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아마 이 물음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스타티…… 누구요?”가 아닐까. --- p.281
다음은 지젝의 지적 스타일의 특징을 포착해 본 것이다. ‘언뜻 보면 핫도그 속에 든 소시지는 빵의 두 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빵 그 자체는 소시지가 노니는 ‘공간’이자, 환영적 ‘틀’일 따름이고, 이것이 없다면 소시지도 의미를 잃고 마는 배경이다. 반면 소시지는 빵 두 쪽 사이에 있는 틈의 체현일 따름이며, 빵들이 서로 합체하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지젝이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내가 지젝을 패러디해 본 것이다. 그렇지만 지젝의 글에는 이 글보다 더 괴상한 구절이 수두룩하다. --- p.318
한번은 버트런드 러셀이 런던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사가 승객을 알아보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산다는 게 뭐요, 선생?”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를 밝혀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이런 대중적인 믿음은 극도로 건조한 논리적 실증주의로도 짓밟을 수 없다. 새로 나온 아이리스 머독의 대작은, 좋건 나쁘건, 그래서 철학이 도대체 뭐냐에 관한 모든 런던 택시 운전사들이 가진 개념을 집대성한다. --- p.401
베컴의 말에 따르면 한때 ‘거기가 무척 더워지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결혼식은 무척 잘 굴러갔다고 한다.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신인류가 한 말치고는 좀 아슬아슬하게 들리지만, 알고 보니 ‘거기’란 어떤 야한 속어가 아니라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그 성의 한 곳을 말한 것이었다.
--- p.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