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방에서 나와보니 마루에서 뜻밖의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듯한 아빠가 팬티만 입은 채 엄마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오늘 입을 옷은 있어야 할 거 아냐.” “대충 아무 거나 걸치면 되잖아.” 짐작할 만한 상황이었다. 오래전부터 엄마는 집안일에 너무 소홀했다. 빨래도 몇 주씩이나 밀려서 할 때가 많았다. “이 여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남편을 보자기로 보나! 몇 벌 되지도 않는 옷으로 매일 돌려 입는데 옷이 어딨어!” 식사 때 마신 술 때문일까. 아빠가 전에 없이 화를 냈다. 삼촌도 마루 한쪽에 서서 사태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옷이 왜 없어!” 안방으로 들어간 엄마는 장롱을 확 열어젖히더니 옷을 꺼내 아빠에게 마구 내던졌다. 모직 코트, 오리털 점퍼, 바바리코트가 아빠의 몸에 맞고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것들은 다 뭐야? 옷 아니야” 엄마는 갑자기 흐느껴 울며 아빠의 공장이 망한 뒤 외할아버지와 이모들에게 빌린 돈을 굴려 용두동 지하경제의 큰손으로 거듭나기까지 자신이 겪은 고난과 역경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저승사라래, 저승사자!내가 왜 그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엄마의 말을 듣는 동안 분노가 사그라졌는지 아빠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바바리코트를 몸에 걸치고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소리 없이 아빠를 쫓았다. 집 뒤편으로 간 아빠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알몸에 바바리코트만 걸친 꼴이 웃기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미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그러자 세상에서 아빠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와락 그를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빠…….’ 내가 주춤거리며 한 발을 뗀 순간, 아빠는 윗몸을 수그리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쫄쫄쫄, 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역시 우리 집에서 휴먼 다큐를 찍는 건 무리인가.’ 그만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리더니 아빠 건너편 샛길에 누군가 나타났다. 교복을 입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여고생이었다. 소변을 보는 아빠와 정면으로 마주친 그 누나는 넋 나간 표정을 지어보였다. 1초, 2초, 3초……. 세상이 전부 멈춘 것 같은 고요가 이어지다가 여고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 변태야!” --- pp.31-32
바바리맨은 입고 있던 코트를 확 펼쳤다. 그러자 덩치는 움찔 놀라며 으악, 소리를 쳤다. 그 장면을 본 나는 깨달았다. 알몸 자체가 무기가 된다는 것을. 바바리맨의 잔털이 돋은 앙상한 맨몸을 보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심각한 정신적 데미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거였다. 바바리맨은 그 이상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덩치의 화만 돋운 꼴이 되고 말았다. 덩치는 씩씩거리며 바바리맨에게 달려들었다. 퍽! 얼굴을 얻어맞은 바바리맨은 곧바로 나가떨어졌다. --- p.63
정비소를 그만둔 후 아저씨는 거의 일 년 동안 골방에 처박혀 나훈아의 공연이 녹화된 비디오를 보고 또 보며 노래와 몸동작을 익혔다. 하루 종일 오로지 연습만 하다가 밤이 되면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태어나서 무언가에 그렇게 열성적으로 매달리기는 처음이었다. 웬만큼 모창 실력에 자신이 붙자 아저씨는 외모도 나훈아처럼 고치기로 마음먹고 성형외과를 찾았다(원래부터 겁이 많은 편이라서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엄청 컸지만 꾹 참았다). 의사의 권유대로 아저씨는 턱뼈와 광대뼈를 조금씩 깎았다. 운 좋게도 눈매만은 원래부터 나훈아와 비슷한 편이어서 얼굴 윤곽을 다듬자 단박에 그와 쏙 빼닮을 수 있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연업소에 나가보니, 그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나훈아 모창가수가 활동하고 있었다. 나운아, 나우나, 나운하……. 그들 틈에서 기가 많이 죽긴 했으나 아저씨는 꿋꿋이 버텨나갔다. 그리고 더욱 완벽한 모창가수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일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꼭 서너 시간씩 연습했고, 나훈아의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그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 p.98
대사를 마친 나는 멍하게 서 있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가면이 아니라 진짜 얼굴? 사람들이 가면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진짜 얼굴이라고?’ 나는 바바리맨을 떠올렸다. 저항과 정의를 상징한다는 가이 포크스 가면. 나는 여태껏 그것과 아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줄 알았다. 그저 단순히 아빠가 우연히 손에 넣어 얼굴을 가릴 목적으로 쓰고 다닌 줄 믿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건 우연이었을까? 만약 일부러 그 가면을 선택했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